2021년 1월 8일 금요일

제17회(1928) 총회장 : 염봉남 [합동]

 충청도 괴산 출신

염봉남 목사(1875. 9. 27-1036. 11. 17)는 충청북도 괴산읍에서 출생했다. 1833년 한문 사숙(私塾)에 입학하여 송철원 선생 문하에서 천자문으로부터 사서오경에 이르기까지 문리를 터득했다.

1804년 기능참봉(冀陵參奉)이란 말직(末職)을 받아 봉직한 적도 있는 그는 대구로 내려와 우연히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남성정예배당(현 대구제일교회)에서 결신해 19111013일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대구 선교지부에 나와있는 어도만(Rev. Walter C. Erdman )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연봉남이 대구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 길거리에서 미국인이 서투른 우리 말로 전도하는 것을 보고 하도 신기해서 가까이 다가갔는데 말로만 듣던 미국인을 직접 보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청중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미국놈 물러가라며 욕설을 퍼 붓는데도 화를 내지 않고 싱글벙글 얼굴에 웃음을 띄면서 간단한 열설을 하고 난 후에는 쪽복음을 나누어 주면서 천지의 대 주재되시는 조물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선교사가 바로 공식 선교사로 영남지역의 최초선교사로 부산에 파송 받은 후 대구를 거쳐 나중 평양선교부 교육담당 선교책임을 맡은 안의와(Rev. James E. Adams, 安義窩) 목사였다. 그는 배위량(William M. Baivd, 裵偉良) 선교사의 처남이다.

 

안의와 선교사로부터 쪽복음 받아

염봉남은 청중들의 비아냥거림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그의 모습에 감동되었다. 선교사로부터 쪽복음을(마태복음) 한권 얻어 가지고 와서 그 책을 1장부터 읽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태복음 제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보를 읽는 순간 이 종교는 양반들이 믿을 종교라고 생각이 들어 성경을 계속 읽어 나갔다.

그는 쪽복음으로 된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이 책은 양반 뿐만 아니라 천민들도 꼭 읽어야 할 귀중한 책임을 알고 선교사가 살고 있는 마을을 찾아 나섰다. 남문 안에 있는 남성정 선교사집을 찾아가서 대담하게 대문을 노크하였다. 누구요?라는 큰 소리가 대문 안에서 들렸다. “저는 선교사님을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온 염봉남이라는 사람이외다.”

아담스 선교사는 신기해 하며 문을 열어 주고 염봉남 청년을 반가히 맞아 드렸다. “선교사님 저에게 쪽복음을 팔게 해 주세요. 저도 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습니다.” 느닷없이 찾아와 성경 쪽복음을 팔게 해 달라고 하는 염봉남에게 아담스(Adams)는 쪽복음을 팔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이 일로 인연이 되어 염봉남은 안의와 선교사의 선교구역에서 일할 수 있는 조사(助師)로 임명을 받고 권서로 활동하였는데, 옆에서 주의깊게 지켜본 안의와는 염봉남의 열심에 놀라고 말았다.

 

쪽복음 파는 권서로 출발

한편 그는 매년 농한기를 이용해 개설되는 달()성경학교에 한번도 결석하지 않고 꼭 참석하여 3년간의 모든 과정을 다 이수하였다. 이에 감동한 안의와 선교사는 염봉남을 1912년 자신의 순회전도사로 임명하였다. 잠시동안 달성지방 내에 있는 3개처 교회를 순회하면서 전도사의 일을 하였다.

염봉남은 이와같이 안의와 선교사의 따뜻한 보살핌과 후원으로 19153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여 5년간의 신학수업을 마치자 자신이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신학교에 다녔던 경산읍교회에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았다.

그는 19209월 경북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고 19211월부터 192316일까지 경산읍교회 제1대 위임목사로 시무하다가 잠시 떠났다가, 19252월에 임시목사로 다시 부임 그 해 말에 사임하고 대구 신정교회(현 대구서문교회)로 전임하였다(경산교회 100년사, 김광남, 2010 대구 pp.196-202).

염봉남 목사는 경북노회 안에서 이름난 양반목사로 존경 받았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대구서문교회(구 신정교회) 당회에서 청빙서를 작성해 한 부는 염봉남 목사에게, 또 한 부는 경북노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염봉남 목사는 평양 장로회신학교 재학시절에 매월 생활비를 보태주고 학비를 보조해 준 경산읍교회를 떠날 수 없어서 처음엔 대구 신정교회의 청빙을 거절하였다(총회를 섬겨 온 일꾼들, 김수진, 2005. 장로교출판사 p.79).

그러나 재차 신정교회로부터 강력하게 청빙해 오므로 염봉남 목사는 대구 신정교회(新町敎會)를 방문하여 당회원들과 함께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장로님들의 뜻은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도 경북도청이 있는 대구로 목회지를 옮기고 싶지만 목사가 기본적인 윤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정중하게 진중한 속마음의 거절의사를 전달하였다.

이 말을 들은 신정교회 당회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설득해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당회원들 마음 속에 약속이나 한듯, 신정교회 당회원들이 똘똘뭉쳐 염봉남 목사를 적극적으로 모셔야겠다는 강한 의중을 갖고 염목사를 설득하였다.

! 목사님의 그 뜻은 잘 알겠습니다. 경산읍교회도 하나님이 세운 교회이고, 대구 신정교회도 하나님이 설립한 교회입니다. 목사님께서는 그렇게도 우리 신정교회 당회원들의 마음과 신정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몰라 주십니까?”

이렇게 얼마동안 서로간 대화를 하다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다시 한번 상면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대구 신정교회 당회원들이 경산읍교회 목사 사택을 자주 드나드는 것을 눈치챈 경산읍교회 당회원들이 염목사 모르게 모여 의논하게 되었다. 당회원들 가운데 어떤 장로는 우리 교회 염봉남 목사를 보다 큰 도시에 가서 목회할 수 있도록 하게 하자고 제안하여 누가 강권한 것도 아닌데 당회원들이 뜻을 모았다.

경산읍교회 당회원들이 당회장 염봉남 목사 사택을 방문해 대구 신정교회의 청빙을 수락하시어 더 큰 사역의 열매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란다고 아름답고 건설적인 권유를 하였다. 이렇게 상황이 바뀌게 되자 염봉남 목사의 대구 신정교회로 부임하는 문제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고 아무 어려운 문제없이 경북의 중심지 대도시인 대구 신정교회로 은혜 가운데 부임하게 되었다.

염봉남 목사가 부임한 1922년 신정교회 교인수는 400여명에 불과했으나 1933년 교인총수는 1988명으로 성장하였고 192856일 대지 569평 건평 294평의 새 예배당을 건축 헌당 하였으며, 염목사는 신앙인격과 리더십도 겸비하여 경북노회 노회장으로 두번이나(1920, 1921) 역임하였고, 192897일에 모인 (대구신정교회당)총회에서 교단의 수장격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7대 총회장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대구 신정교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

총회장으로 당선된 염봉남 목사는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신정교회 성도들과 경북노회 전교회가 환호하고 기뻐하였다. 그가 사회석에서 총회를 진행하면서 뜻있는 몇가지 사항을 결의하였다.

한국에서 중국으로 파송된 선교사들에게 만 7년이 되면 1년씩 안식년을 주기로 하다. 총회산학 각 노회는 농촌부를 설치하고 동시에 총회는 농보(農報) “농민생활지를 간행하기로 하다. 조선주일신보 아이생활지를 출판하도록 하다. 장로교 감리교가 협동하여 12월에 신정찬송가를 간행하기로 결의하였다.

염봉남 목사는 대구 신정교회를 부흥시킨 목사이고 신정교회 정통성을 이어받은 제2교회 90년 역사에서 노회와 총회에서 많은 공헌을 한 위대한 목사로 역사에 길이 남긴 교회의 지도자로 승리한 주의 종으로 길이 기억해야 할 영남지역의 초기 지도자였다고 하겠다.

1936117일 염목사는 조용히 주님의 부름을 받고 영민하였다(미간행, 대구서문교회 100년사, 이혜정 박사 저 2015, p.159).

 

[출처 : 교회연합신문]

제38회 총회장 : 명신홍 [합동]

 오늘의 예장합동 측을 있게 한 공로자

 

평안도 평원출신

명신홍목사(1904. 4. 14~1975. 10. 14)는 평안남도 김제면 원장리 145번지에 명진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께서는 무식했고 딸만 셋이나 낳다가 네 번째 장손인 신홍을 얻어 어떻게 해서라도 교육을 해야겠다는 열심히 있어 나이 5살 때 집에서 4리쯤 떨어진 리인리(里仁里)에 교회가 들어서고 또 신학문을 가르치는 신식학교 관란학교에 입학시켰다. 신홍은 생애 처음으로 배움의 터전에서 자랐다.

9살 되었을 때 합성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는데 다른 것은 어렵지 않으나 산술만은 아직 아라비아 숫자도 익히지 못한 터라 3학년의 산수를 따라 갈려니 어려워 학교 가기를 망설이고 있을 때 손위 누나가 위안을 주며 친히 가정교사 노릇을 해주어 점점 공부성적이 뛰어 올랐고 얼마 후에는 반에서 1등을 하기도 하였다.

집에서 5리가 넘는 교회도 주일 낮 예배만 아니라 칠흙같은 어두운 밤에도 초롱불을 들고 다닐 정도로 신앙생활에도 열성적이었다.

이렇게 합성학교를 마친 후에는 중학교를 가야 하는데 그때 마침 숭실중학교에서 우호익선생을 중심으로 한 시험관이 합성학교에 와서 입학시험을 치루는데 부모님께서는 장사 밑천을 대서라도 공부를 시켜보고자 해 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합격이 되어 그해 4월에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숭실중학교를 거쳐 일본 유학

15세의 소년으로 숭실중학교 기숙사의 찬 마룻바닥에서 잠을 자며 1년간 다섯 명이 한 방에 살면서 때로는 자취생활을 하면서 학교생활을 하였다. 19193·1 운동이 일어나 모두들 거리로 뛰쳐나가 처음으로 조국이 무엇이며 민족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우리 조선도 어서 속히 독립국가가 되어야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즈음에 부모님들이 고향에서 한 30리쯤 떨어진 평원군 덕산면 봉도리로 이사를 했다.

18세가 되던 해에 다시 숭실중학교 4학년에 복교해 졸업하고, 1929년 겨울 김제면 원양리에 살던 차도정(車道正)씨의 장녀 차덕실(車德實)을 만나 결혼하였고 13녀를 낳았다.

명신홍에게는 개인적으로 큰 변화의 계기가 왔는데,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새로운 세계와 내일을 준비하는 유학의 길이 트인 것이다. 여러 어려움을 겪은 생활이었지만 내일의 한국교회의 큰 일꾼이 되기 위한 준비기간이기도 했다.

동경에 있는 일본대학(日本大學)에 들어가 고학으로 공부했다. 정식 졸업은 못하였으나 수료과정을 마치고 같은 지역에 있는 일본신학교(日本神學校) 본과에 진학하여 3년 과정을 이수하고 수료하였다. 그때만 해도 일제하라 더 학업을 지속하지 못하고 일본에서의 생활을 접고 1933년 귀국선을 타고 고향에 돌아와 1937년까지 평안북도 평원군에 있는 진지동교회에서 처음엔 전도사로, 나중엔 목사로 장립을 받고 목회를 하였다.

 

미국에서 신학공부, 한때 미 군정 통역관 활동

명신홍목사는 보다 먼 미래의 조선교회를 위해 평양장로회신학교를 마치고 1937년 도미 계획을 실천, 태평양을 건너 보수정통신학의 명문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유학을 하여 그곳에서 신학석사 학위과정을 이수하고 졸업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마친 것으로 끝내지 않고 다시 칼빈신학교로 가서 대학원과정을 이수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고, 대동아 전쟁의 여파로 귀국할 형편이 못되어 뉴욕으로 가서 귀국 기회를 엿보면서 뉴욕에 있는 비브리칼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다시 신학석사 학위를 마치고 졸업하였다.

학업을 마친 후 귀국할 형편이 또 미루어지면서 잠시 동안 미 국무성 우편물 검열국에서 검열관의 자리를 얻어 19458월 귀국하기 직전까지 근무하였다.

일본제국주의가 연합국에 항복하게 되어 광복이 되자 즉시 미국으로부터 귀국하자마자 미쳐 정부수립 작업의 과도기로 유엔 감시 하에 총선이 이루어질 때까지 과도정부격인 미 군정청(美軍政廳)에서 고문관으로 봉직,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이승만)가 정식 발족되기까지 해방공간 2년간의 환란기를 통역관으로서, 종교인으로서 국가발전에 일시적이었지만 크게 이바지하는 기간이기도 하였다.

 

신정교회(대구서문교회)서 목회

1946년부터 1957년까지 만 10년이 넘는 인생 황금기에 신정교회(대구서문교회)에 부임, 담임목사로 지역에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써 리더십을 십분 발휘한 기간이기도 했다. <서문교회 100년사>를 쓴 이혜정박사는 정재순목사가 사임함에 따라 1946년 명신홍목사가 신정교회(新町敎會)에 부임했다. 명신홍목사는 1946724일 신정교회에 부임하여 8·15 해방과 6·25 전쟁 등 한국 격동기 11년간 시무하면서 교회 창립 40주년 행사 등 교회를 안정시킨 목회자이다. 명신홍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과 미국에 유학하신 목회자로 신정교회에 부임하여 1947216일 위임받아 1957년까지 11년간 담임목사로 헌신하면서 특히 미 군정청 고문관 시절에 영어 통역관의 역할을 하면서 대구시의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19481017일부터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교육기관으로 유치원을 개원 운영했고, 19506월엔 중등부가 조직되었고 1952년엔 전쟁의 와중에서도 교회 설립 4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하기도 했다(미간행, 대구서문교회 100년사, 이혜정 편 p168).

 

총회신학교 교수 및 학장 역임

명신홍목사의 인생 후반부 사역과 활동에 대해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교단의 인재양성 기관이요, 목회자 양성기관인 총회신학교 교수사역과 학장의 활동이라 하겠다. 그가 총회신학교와의 인연은 6·25전쟁으로 인해 총회신학교가 대구서문교회당에서 잠시 운영되고 있을 때부터 교단의 요청으로 교수로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본다.

그는 이미 경북지역의 중심지인 대구에서 목회자로 서문교회만 섬긴 목사가 아니라 경북노회(1951)와 전쟁이 한참 전개되고 있던 19534월 자기가 시무하고 있던 대구서문교회에서 개최된 제38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이미 교계에 익히 알려질 정도로 지도자상을 나타내 보여주었다.

1953727일 정전이 되자 총회신학교도 자연히 정부를 따라 수도 서울로 이전하게 되었는데 명신홍목사도 교수자격으로 서울로 이거하게 되었다. 그가 상경한 후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 외에도 교회의 지도자로서 19534월엔 화란 왓스코텐 개혁교회 동부대회에 한국대표로, 이듬해 19548월엔 미국 프린스톤 개혁교회세계대회, 19558월 미국 에번스톤 세계기독교연합회, 19593월 미국 미주리 주 타키오대학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학위(D.D), 19629월 총회장으로부터 교단과 신학교에 끼친 공로로 표창, 이외에도 여러 기관의 이사(H.L.K.X 방송), 장로교와 개혁교회 소속 세계대회에 한국교회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드디어 19652월엔 그가 평생 몸담아 가르치던 총회신학교 수장(교장)의 자리에 올라 19692월 퇴임하기까지 봉사하였다.

예장총회장을 지낸 창신교회 원로 신세원목사는 명신홍목사를 목회자, 교회행정가, 뛰어난 교육행정가로 평한 바 있으며(신학교육과목회, 정성구, 1997. p.47), 대성교회 원로요 총회장을 역임한 서기행목사는 (신홍)박사님은 오늘의 우리 예장통합 측을 있게 한 공로자요, 오늘의 총신대학교의 기초를 쌓은 분”(같은 책 p.50)이라고 했다.

 

박형룡·박윤선·명신홍 3대 거장

그의 제자요 총신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김의한 박사도 ()목사님은 명()목사님이셨다. 목회에 대성하셨고 총회장도 역임하셨고, 총신의 교장으로도 봉사하셨다.”(같은 책 p.201)

<신학교육과목회>라는 제목으로 명신홍박사의 전기를 펴낸 전 총신대학교 총장 정성구박사는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우선 박형룡 박사님으로부터 철저한 칼빈주의적 신학체계를 세웠던 일이고, 나의 영적 아버지였던 박윤선 박사님으로 부터 선경신학의 맥과 신앙의 참모습을 전승받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명신홍 박사님으로 부터는 설교의 신학과 실제의 참뜻을 배웠다.

세 분 모두가 철저한 칼빈주의자들이었기에 후일 편자가 칼빈주의 사상을 정리해서 20년 이상 가르칠 수 있게 된 동기가 되었다”(같은 책 서문, 정성구의 글 p.37-38 참조)

1953424~28일에 있었던 대구서문교회 총회에서 결의된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통일 없는 휴전 반대하기로 하다. 106일 문교부로부터 총회신학교 설립허가를 받다(교장 감부열 선교사). 경안노회를 경안·강동 노회로 분리 허락하다. 예배당에서 성극과 유희하는 것은 가히 합당치 못함으로 각 당회가 신중히 처리하기로 하다. 목사 김재준 씨는 제36회 총회 결의 위반 및 성경 유오설을 주장했음으로 목사직(牧師職)을 파면하고 그 직분 행함을 금하다. 기독교장로회 측이 분열해 나가다(98회 총회 찰요, 예장총회 2014. 3 p.18 참조).

현재의 사당동 총신대학교 종합관 새 건물 이전의 본관건물은 학교발전계획에 따라 철거되었지만 본관 구건물은 명신홍목사가 육신의 질병을 몸에 지닌 채 본관건물 신축을 위해 미국에 가서 교통비(비행기를 타지 않고 선편으로 귀국함)를 아끼고 숙식비를 아끼며 모금한 미국교회의 후원으로 건축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는 전설처럼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것을 보면 명신홍 학장의 총신사랑의 열정을 후학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출처 : 교회연합신문]

제50회 총회장 : 정규오 [합동]

 한국교회의 보수신학을 지킨 선구자

 

전남 나주 출생

정규오목사(丁奎五, 1914. 10. 14~2006. 1. 19)는 전라남도 나주군 다도면 방산리(용동)에서 정효순(丁孝純)씨와 강누동(姜樓洞)씨 사이에 5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는 이미 많은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교회를 세우고 1907918일엔 조선장로교 7인의 목사가 탄생했고, 목사 장로가 중심이 되어 노회(老會)가 형성되었고, 1912년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이 총회가 조직된지 2년째 되는 해인 1914년 장차 그 총회를 위해서 사역할 한 주의 종이 조선의 남쪽 끝 나주(羅州) 땅에서 태어났다.

나주는 공교롭게도 이 지역을 선교지로 위임받은 배유지(Rev.Bell Eugene 裵裕址)목사에 의해 선교가 이루어졌다. 배유지 선교사가 그토록 보수신학과 신앙을 위해 몸 바치고 헌신했던 그 땅에 앞으로 그 보수신학과 신앙을 위해 헌신할 한 사람을 태어나게 하심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었던 것을 누가 알았을까?

정규오가 태어난 1914년의 방산(芳山)지역은 이미 1896(고종 33)에 한반도에 13도 제도가 시행되어 전라도가 전북과 전남으로 나뉘어졌는데, 전라남도로 나누어진 1896년에 전남지방에 최초로 복음이 전래된 지역은 당시 전남의 행정중심지였던 나주였다. 그해 11월에 당시 평양 장로회신학교 조직신학교 교수였던 이눌서(Rev. Reynoles William. D)와 배유지 선교사는 함께 전남지역의 나주를 답사하고 복음을 전했다.

 

주일학교에서 선교사들로부터 교육받아

정규오는 어려서부터 주일학교를 다녔고 주일학교에서 철저한 보수주의 신앙훈련을 받았다. 당시 교회는 선교사들을 통해 겨울이나 여름휴가를 이용 성경을 집중연구하는 부흥사경회로 교인들에게 신·구약 성경을 가르치는데 치중하였다. 나아가 새벽기도회, 가정예배, 금요구역예배도 거의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정규오는 동내에 세워진 교회에서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았다. 한국인 목사 장로들을 통해서도 교육을 받았지만 선교사들을 통해서도 배우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보수적인 가르침과 신앙교육은 후일 그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는데 큰 힘이 되었고 원동력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가 교단의 신학적 입장을 누구보다도 확신있게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이때 갈고 다져진 철저한 주일학교 교육과 사경회를 통해 얻은 신앙적인 확신에서 였다고 하겠다.

정규오는 당시 방산교회 안에 사립 사설강습소가 있어서 2년동안 학습하였고, 후에는 다도면 판촌에 설립된 공립 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해 4년을 마치고 졸업하였다. 이때 어린 정규오에게 평생을 좌우할 선물이 주어졌는데, 그 선물은 다름 아닌 책()이었다. 당시 당산교회 송복순전도사님 남편 남복우씨가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많은 책을 가지고 왔는데 그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 많은 책들이 그에게 넘어왔다. 그는 이 책들을 통해 동서양의 지식과 사상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 책 중에는 일본에서 간행된 중학 강의록과 와세다대학 강의록이 있어 지식의 기초를 쌓았고, 엔사이구로베지아 일본대사상전집, 법학, 철학, 윤리학에 관한 서적과 칼 맑스가 쓴 자본론 전집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여러 이론 중에 맑스의 사상을 연구한 이유는 그의 생질 이민호와 이론투쟁에서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문학·법학·철학·신학 등 사상 섭렵

그는 19459월 신학교에 진학하기 전부터 독학을 통해 여러 학문 세계를 접하면서 신학연구를 위한 인문소양의 지식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신학하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으나 하나님은 이미 한 시대의 일꾼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예비단계로 미리 많은 책들을 통해 그의 사상기반을 다지신 것이었다고 하겠다.

특히 공산주의 이론에 대한 그의 비판은 그 생애의 큰 사명이기도 했다. ·우익 대결 속에 6·25라는 참상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잔학상과 허구를 직접 눈으로 체험한 자로써 공산주의로부터 기독교 복음을 변호할 책임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규오목사 생애 가운데 한 가지 특기할 것은 신학교에 입학 하기 전에 이미 박형용박사가 쓴 한국의 정통 기독교 변증서라고 할 수 있는 1935년판 <신학난제선평>(평양신학교 간행)을 만난 것이다. 이 책은 자유주의 신학사상들을 신신학으로부터 출발하여 당시 조선교회에서 유행하던 이사상에 이르기까지 열거하고 비평한 전 18850페이지에 달하는 변증서요, 급히 몰아치는 자유주의 신학사상에 대한 경고를 시도한 신학서적이었다. 딱딱하고 어려운 학술서적이지만 그는 일본에서 나온 많은 사상서들을 읽은 경험이 있어 어느 정도 소화할 수 있었고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접하게 된 사연이 있는데 그가 193411월부터 1940년 초까지 광양진상금융조합 서기로 6년간 일할 때에 출석했던 당시 광동중앙교회 담임목사(김순배)로부터 서제에서 선물로 받았던 애장품이었는데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그 책의 저자 밑에 강의를 받게 된 것이다. 얼마나 깊이 있게 그 책을 열심히 읽었던지 그 책의 내용을 저자 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이 책만큼은 저자 박박사님보다 제가 신학난제선평을 더 잘 알고 있을런지 모른다>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청년 정규오가 박형룡박사의 책과 만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규오는 드디어 19459월 서울에 있는 조선신학교에 입학하였다. 38선이 그어져 남북간의 통행이 막히게 되고 해방직전 일제에 의해 조선예수교장로회가 해산 당하고, 8·15 광복 직후 <남부총회>라는 이름으로 복구되었으나, 총회직영신학교로 자유주위 신학을 대변해 온 조선신학교가 김재준을 중심으로 일부 교수들이 선교사들이 전해 준 정통보수신학에 반()하는 성경관과 신학을 주장하며 가르치고 있었다. 그같은 자유주의 신학에 저항하여 투쟁함으로 장로교회의 정통보수신학을 지키고자 일어난 그룹이 바로 ‘51인 신앙동지회였다.

 

51인 신앙동지회 규합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

당시 남부총회로부터 직영신학교로 인정받은 조선신학교가 자유주의로 기울어져가고 있는 현실을 묵과할 수 없었던 정규오는 정통보수신학을 사랑하는 동지 51인을 규합하여 1947418~22일에 대구제일교회당에서 개최되는 제33회 총회로 내려가 진정서를 제출, 총회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타파하고 그 주동자들을 축출하는데 앞장섰다. 그들의 진정서 안에는 (전문) 조선신학교에 와서 성경과 신학을 배울 때 우리는 우리의 유시(幼時)부터 가지고 오는 신앙과 성경관이 근본적으로 뒤집어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정규오 목사의 신앙관과 정통보수신학과 정의감이 얼마나 투절했던가를 엿볼 수 있다 하겠다.

여기서 잠시 정규오 목사와 박형룡 박사의 관계를 짚고 가자. 이미 정규오 목사는 박형룡 박사를 만나기전 그의 저서를 읽고 만난 점과, 해방 후 박형룡 박사는 10년여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목숨을 건 모험끝에 만주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박박사는 고려신학교 초청도 있었지만 51인 신앙동지회 탄원서에 용기를 얻어 엘리야 선지자를 생각하면서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서울에 도착하여 숙소(여관)에 머물러 있을 때 찾아간 51인 신앙동지회를 대표한 정규오 회장과 학생들에게 학생들의 탄원서한이 없었던들 귀국의 결심이 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한국교회는 아직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미칠 때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났다고 고백하였다(정규오 생애와 삶 p.34. 2011).

정규오 목사를 이야기 할 때는 W.C.C 반대 투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신앙동지회는 19537월 미국복음주희협회와 같은 소속인 한국복음주의협의회(N.A.E)를 조직했다. 이 세력은 대한예수교장로회 내에서 일정한 교권을 형성하면서 WCC에 대항하였다. 에큐메니칼운동은 세계교회들이 지향하고 있는 하나의 새로운 움직임이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WCC 1차 총회(1948)2차 총회(1955)에 대표를 파송하였는데, WCC문제로 인해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1회 총회(1955), 42회 총회(1957) 43회 총회(1958)에서 양측이 충돌하고 말았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에큐메니칼연구위원을 선출하였는데 지지측에 한경직 전필순 유호준 안광국, 반대측에 박형룡 박병훈 황은균 정규오 였다. 이 두 그룹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반대에 박형룡 정규오였고, 지지측엔 한경직 유호준이었다.

이렇게 정규오 목사는 언제나 박형룡 박사의 신학과 함께 갔고 오늘의 보수신학을 지키는 선구자로 남게 되었다. 1979년 대구 동부교회에서 개최된 제64회 총회시 이끌고 나갔던 개혁측을 자신이 죽기전 합동으로 환원시키고, 그는 2006119일 주님의 품에 안기웠다.

그가 총회를 이끌었던 제50회 총회의 결의 안건들을 보면 교단지<기독신보>를 당국으로부터 인가받아 간행했고, 교역자 사례비의 5%를 적립해 은급제도 시동을 걸었으며, 총회신학교 신축건물을 기공했고, WCCNCC와 관계되는 단체와는 협력 않키로 결의를 했다.

김남식은 해원 정규오를 가르켜 <그는 우리 시대의 거목이었다>면서, 고 정규오 목사의 인간됨과 일생을 농축한 말로 쉼표를 찍었다(해원 정규오목사새한기획 출판부 2007. 서울 p.45).

 

[출처 : 교회연합신문]

제17회(1928) 총회장 : 염봉남 [합동]

 충청도 괴산 출신 염봉남 목사 (1875. 9. 27-1036. 11. 17) 는 충청북도 괴산읍에서 출생했다 . 1833 년 한문 사숙 ( 私塾 ) 에 입학하여 송철원 선생 문하에서 천자문으로부터 사서오경에 이르기까지 문리를 터득했다 . 1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