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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28일 화요일

백일규 [白一圭, 1880.3.11.~1962.5.31.]

백일규 [白一圭, 1880.3.11.~1962.5.31.]


 

# 초년기

 

백일규는 1880311일 평안남도 증산군 성도면 오화리에서 태어났다. 훗날 그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 기와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로 볼때 그는 어린 시절에 유복한 환경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7살 때부터 서당을 다녔고 20세까지 한학을 배우고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가 하와이로 이주하기 전에 국내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의 흥사단 입단 이력서에는 그가 백도접주(白道接主)’라는 단체에 속해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그가 동학에 입도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어떤 경위로 동학에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던 1905, 백일규는 공립학교 교원이었던 강명화를 통해 하와이에 대해 듣게 되고 강명화를 따라 하와이로 떠났다.

 

# 미국에 적응하다

 

하와이에 도착한 백일규는 곧 에와(Ewa)에 있는 사탕수수 농장에 배치되어 고된 노동을 했고 하와이의 한인단체인 '에와친목회'에 가입했다. 에와친목회는 1905년에 윤병구, 정원명, 강영소 등이 결성한 단체로, 단순히 친목만을 위해 조직된 것이 아니라 조선의 국권 상실에 대해 논의하고 방책을 고안하는 곳이었다. 이후 백일규는 1년간 하와이에서 일하다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미국 본도로 건너가기로 결심했다. 샌프란시스코로 향한 그는 그곳을 중심으로 각종 농장이나 광산, 철도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미주 지역의 대표적인 국권회복운동 단체인 대동보국회 창단에 가담해 장경, 이병호, 문양목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대동보국회는 19071월 국민계몽과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공립협회와 함께 미주의 대표적인 민족운동 단체로, 교육과 실업, 자치라는 실력양성론을 내세우면서도 황제권의 강화를 통해 국권회복을 추구하는 보황적 성격도 갖고 있었다.

 

1908, 백일규는 대동복국회 중앙회장을 맡았으며 회의 기관지인 <대동공보>의 주필이 되었다. 이무렵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스 암살 사건이 벌어졌다. 이 일로 두 의사가 법정에 서게 되자, 백일규는 7인의 전권위원회에 참여하여 의사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이후 네브라스카주로 이주하여 영어를 배웠고, 1909년부터 1911년까지 대학 예비과에 다닌 뒤 1912년에 네브라스카 주립대학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그는 박용만(朴容萬)과 함께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 운영하면서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입학 후 학업을 열심히 수행하던 그는 1913년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 사로부터 주필로 와달라는 초빙을 받고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1년간 <신한민보>사의 주필을 맡았다. 그 후 다시 버클리 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는 동시에 건물 관리인으로 일하며 매달 19달러를 받았다.

 

1918년 버클리대학을 졸업한 백일규는 19193월부터 <신한민보>'한국경제사'를 연재했고 다음해 282.8 독립 선언 1주년 기념일에 맞춰 연재한 칼럼을 모아 책으로 발행했다. 백일규 저서 <한국경제사>는 최초의 한국경제사 서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그는 서문에서 자신의 저술이 국가 독립에 있음을 밝혔다.

 

국가의 경제사는 그 국가의 정치사 보다 더 필요한지라. 정치의 혁명을 먼저 한 법국 보다 공업의 혁명을 먼저 한 영국이 오늘날 세계적 국가를 이루었고 민사형법을 먼저 발전한 법국 보다 통상상법을 먼저 발전한 영국이 오늘날 세계의 상권을 잡은 즉, 이것만 보아도 어느 것이 더 필요한 지 가히 알지라()우리의 경제역사를 더 연구하여 발전시키면 우리국민의 경제적 교육과 경제적 독립에 관건이 될까 하여 인하여 국가독립이 신속히 성취되며 영원 무궁할까 하노라.

 

한편, 백일규는 학업 중에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대의장으로 활동하면서 총회장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3.1 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39일에 전해지자, 국민회 총회장 안창호는 곧바로 사무실에 나가 임시의장을 맡고 있던 백일규와 함께 대한독립선언의 후원의 방침에 대해 논의했다. 백일규는 안창호를 도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국민회관이나 예배당에 모여 후속대책을 협의했다. 안창호가 상하이에 마련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석하기 위해 상하이로 간 뒤, 백일규는 미주지역에서의 3.1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미국, 하화이, 멕시코 지역 일대의 독립운동을 통솔하며 각국 수상들에게 호소 편지를 쓰고 일본 상품 배척운동 및 한인 인구등록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 조선혁명당 미주총지부

 

백일규는 1926년부터 1933년까지 8년간 북미지방 총회장 겸 신한민보사 사장 겸 주필을 맡았다. 그러던 중 1929년 세계 대공황이 발발하자, 재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에 백일규는 이들을 포섭해 국민회에 끌어들임으로서 안창호가 떠난 뒤 갈수록 활동이 부진해지고 보수적 성격이 강화되는 국민회에 활력을 불어넣으려 했다. 그러나 국민회를 장악한 보수계 인사들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백일규는 국민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한인들이 거의 살지 않는 캔자스 시로 이주하여 동양상품 겸 야채가게를 경영하면서 조용히 살았고, 간간히 진보적인 견해를 <신한민보>에 기고하며 국민회의 보수파 인사들을 비판했다.

 

그러던 194112,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감행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에 참여했다. 조선혁명당 미주총지부는 194263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조선의용대 후원회 연합회가 정치단체로의 변화를 기도하여 결성된 단체이다. 미주지역에서 진보적인 인사들 가운데는 적극적인 군사운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추진하고자 하였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의용대 후원회연합회가 조직되었다. 그 후 민족혁명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참가하고 조선 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참가하자, 조선의용대 후원회 연합회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로 개편되었다. 미주총지부는 1943년 기관지로 <독립>이라는 신문을 발간했는데, 백일규는 이 신문의 발기인이자 주요 논객이 되었고 19456월에는 <독립>의 사장 겸 총무로 활동했다.

 

# 광복 후 행적

 

19458.15 광복이 찾아왔다. 이듬해 하와이 국민회의 기관지 <국민보>의 주필로 초빙을 받게 된 그는 하와이로 이주해 <국민보>의 주필로서 재미 동포들을 위해 여러 칼럼을 기고했고, 조국의 동포들을 도울 방안도 보색했다. 4년 후 70대가 넘은 그는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갔고, 국민회 중앙감찰위원을 맡아 미주 한인사회를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신한민보>에 지속적으로 글을 기고했다. 그러던 1962531, 백일규는 사망했다. 향년 82. 그의 유해는 로즈데일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20029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백일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링크]

2020년 7월 27일 월요일

백낙준 [白樂濬, 1895년 3월 9일 ~ 1985년 1월 13일]

백낙준 [白樂濬, 189539~ 1985113]


  • 지난날 대한민국 제2대 문교부 장관·무소속 초선 참의원 등을 지낸 대한민국 대학 교수 출신 정치가이다.
  • 그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교육자, 국문학자이자 한글학자, 기독교사학자, 정치가였다. 문교부 장관 직책을 지낸 그의 본관은 수원(水原), ()는 용재(庸齋), 미국식 이름은 조지 페이크(George Paik), 일본식 이름은 시라하라 라쿠준(白原樂濬).

 

# 생애 초기

  • 1895(고종 33)에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 관삼동에서 농부 백영순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다가(러일전쟁 후 서당이 없어지면서 기독교 교회에서 세운 영창소학교를 다녔다) 1910(융희 4) 봄에 평안북도 선천군의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에 입학하였다. 중학교 재학 중 그는 선교사였던 교장 윤산온(尹山溫, McCune,G.S.) 목사의 실천에 감동받아 그의 영향을 받았다. 1911년 초 105인 사건 연루자로 지목되었으나 신성학교 교장인 윤산온의 도움으로 피신해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윤산온은 중학교 재학 중이던 그를 신성소학교의 강사로 채용하였으며, 윤산온은 백낙준의 후견인이 되었다.
  • 1913년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신성소학교의 교사에 채용되었다. 윤산온의 도움으로 1913년 중화민국 허베이 성 톈진의 신학서원에 입학하여 1917년 졸업하였다. 유학 중이던 1914년 이후에도 그는 신성소학교 교사직을 유지하였다.
  • 1916년 미국에 건너갔으며 막노동을 하며 학비를 마련하였다. 1918년에 미국 파크 대학교 역사학과에 입학하였다. 1922년에 윤산온의 모교인 파크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서양사 전공)하고 프린스턴 신학교에 편입학하여 1922년부터 1925년까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을 수학하였다(19259월 프린스턴 졸업). 대학 재학 중에도 그는 윤산온의 후원 외에도 고학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였으며, 1923년에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1925년에는 예일 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역사를 수학하였고 1927년에 논문 <조선신교사 (朝鮮新敎史)>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일제 강점기 활동

# 교육자 생활

  • 귀국한 뒤 조선YMCA기독교청년회에 가입하여 YMCA청년회 이사가 되고 조선기독교서회 이사에도 선임되었다. 1927년 유억겸의 추천으로 연희전문학교의 문과 교수가 되었으며 같은 기독교계 학교인 이화전문학교 등에도 출강하며 당시 이 학교 학감이던 김활란 등과도 교분을 쌓게 된다. 같은 해 연희전문학교 문과 학과장에 임명되었다. 백낙준은 이 밖에 당시 보성전문학교를 경영하고 있었던 인촌 김성수와도 친분을 쌓았다. 그리고 근화여자실업학교에도 문과 교수로 출강하였다. 1938년에는 영국 왕립역사학회 회원이 되고 영국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 이사에도 선임되었다.
  • 193457일 이병도 등과 진단학회의 창립에 참여하여 발기인 및 창립회원이 되었다. 조선민속학회의 창립에도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고 조선어학회에서도 추천받아 회원이 되었다. 그는 연희전문, 보성전문의 강의활동 외에도 영국과 미국의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학술, 강연 활동을 돌아다녔으나 조선어학회 관련자로 지목되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으로부터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 1939년 여름 강연을 마치고 귀국했다가 종로경찰서에 체포,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투옥 중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 교수직을 모두 사임하였다.

 

# 태평양 전쟁 전후

  • 19422월 국민총력 조선예수교 장로회총회연맹이 주최한 지방시국강연회 연사로 선정되어 경의선 지역을 순회강연하였다. 4월 기독교 각파의 합동기관지인 기독교신문협회 이사 및 기독교신문편집위원으로 임명되면서 일제침략정책에 부응한 편집과 황민화정책 및 전쟁협력을 강조하는 설교와 사설을 집필하였다. 19424월 피어선기념성경학원 유지재단 이사회 이사 및 회계 실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6월 조선예수장로회 총회장 최지화(崔志化), 교육부 총무 정인과·이용설(李容卨오문환(吳文煥) 등과 함께 조선군사령부에 육군환자용 자동차 2대분인 23천원의 기부금을 바쳤고,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비행기기부회에서 제공한 돈으로 구입한 일본해군전투기 헌납기념식에 참석하였으며, 11월 경성경기합동노회 규칙부원으로 임명되었다. 19439월 재단법인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유지재단의 이사에 재선임되었다.
  • 백낙준은 독실한 개신교신자로 <한국기독교교회사>를 집필할 정도로 교계와 깊은 교감을 갖고 있었다.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백낙준은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과 같이 친일인사보다는 민족 교육의 선각자로서 더욱 널리 알려져 있지만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전쟁용 비행기 헌납 지원단체인 조선장로교신도 애국기헌납기성회 부회장을 지내면서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 전쟁을 '아시아인의 해방을 위한 성전'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제자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인물이었다.
  • 그러므로 친일인명사전의 발간시 고려대학교, 연희대학교(현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 대학 총장들의 친일행위가 지적되기도 하였다. 김활란 이화여대 초대 총장은 1943매일신보열혈남아이거든 이때를 놓치지 말라’, ‘남자에 지지 않게 황국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하라)는 글을 기고했다. 또 유진오 고려대 전 총장은 국민총력조선연맹집회에서 지원병 독려 연설을 했고, 백낙준 전 연희대 총장도 조선임전대책협의회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 광복 이후

# 광복 직후

  • 19459월 경성제국대학교가 적산불하로 미군정에 의해 경성대학교(서울대학교의 전신)으로 개편되면서 경성대학 법문학교 교수가 되고, 법문학부장을 겸임하였다. 또한 미군정에 의해 설치된 조선교육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어 교육심의회 구성에 참여하였으며, 정부수립 후에도 한국교육위원회로 개편되었을 때도 자문위원직을 유지하였다.
  • 194512월에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맡았고, 11월에 귀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봉영회에 참석한 뒤 임정 인사인 신익희, 김구 등과 함께 국민대학설립기성회의 설립에 참여하고, 국민대학설립기성회 창립발기인 및 회원이 되었으며, 국민대학교의 개교와 재단 이사로 참여하였다.
  • 1946년에 연희전문학교가 연희대학교로 승격되면서 초대 총장이 되었다.
  • 19476월 미국 북장로교회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 1948815일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돌아가 194811월까지 신앙간증, 순회강연을 다녔다. 순회 강연 도중 1948년 모교인 미국 파크 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를 수여받았다. 1948년부터 미국 하버드대학교 옌칭학사(燕京學社, Harvard Yenching Institute)의 후원을 얻어 한국역사학 관련 연구소 설치 및 기금마련운동을 추진하였다. 194912월 연희대학교 내에 부지를 마련하고 동방학연구소(東方學硏究所)를 창립하고 초대 총장이 되었다. 동시에 학회지인 동방학지를 발간하고 편집인이 되었다. 동방학연구소는 1977년 연세대학교 국학 연구소로 개편되었다.

 

# 정치 활동과 사회단체 활동

  • 19505월부터 195210월까지는 문교부 장관을 맡아 한국 전쟁 중의 교육 문제 해결에 진력하였다. 문교부 장관으로 재직 중, 그는 홍익인간의 교육이념을 세우고 의무교육과 교육자치제를 실시하였으며, 6.25 전쟁 중에는 전시 노천 교육과 전시 연합대학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피난지에서 각 대학의 교수들을 소집하여 대학생들에게 각 전공, 교양 등의 과목을 수학하게 하였으며, 이때에 그는 이승만 대통령과 김성수 부통령에게 의무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설득하였다. 1950년 장관 재직 중에 총리 서리로 임명되어 국회에 승인요청되었다. 그러나 표결 결과 국회의원 재석 123명 중 찬성 21, 반대 100, 기권 2표로 부결되자 대통령 이승만은 국회에 다시 재심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유네스코(UNESCO) 7차 총회에 한국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추가 선출되어 다녀왔다. 
  • 1953년 서울특별시 교육회 3대 회장과 4대 회장에 연임되었다. 세계 대학봉사회 한국지부 이사장, 한국 YMCA연맹 위원장과 YMCA 청년회 유지재단 이사장에도 선출되었다. 다시 1954년 유네스코 제8차 총회에 한국수석대표로 참석하였고, 1956년에는 대한교육연합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54년 미국 스프링필드대학교에서 명예인문학박사를 받고 1958년 디포대학에서는 명예법학박사를 받았다. 1956년부터 한국행정연구회의 창립에 참여하여 그해 1012일 한국행정연구회를 창립하고 회원이 되었으며, 같은 날 초대 회장에 선출되어 1959831일까지 재직했다. 한미합동경제위원회 등과 함께 195991일에 발간하는 행정학 사전 편찬, 발간사업에 참여하였다. 
  • 1959년 동국대에서 백성욱 총장 회갑 기념 논문집을 발간할 때, 편찬위원장으로 참여하였다.

 

# 교회 단체 활동

  • 광복 이후에도 그는 19545~6월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의 초청으로 미국에서 신앙간증, 순회강연을 하였다. 195212월부터 195610월까지는 대한 YMCA 기독교 청년회 연합회 이사장에 선출되고, 퇴임 후 YMCA 기독교 청년회 연합회 유지재단 이사장이 되어 1964년까지 맡아보았다. 또한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후원회원이 되었다. 
  • 1966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기독교 교파간의 연합 회의인 "교회와 사회 세계회의"에 한국측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고 돌아왔다. 1972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서울 서노회에서 명예목사로 추대되었다. 1981년부터는 한국기독교학교연합회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1982년 한국 기독교 백주년 기념사업회 명예총재로 피선되었다.

 

# 정치 활동

# 참의원 의장 재직

  • 19605월 민참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어 1960년부터 1961년까지 참의원 의원이었고, 19607월에 민의원에서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3표를 얻었다(윤보선 208, 김창숙 29). 19608월부터 1961516일까지 참의원 의장으로 재직하였다(윤보선이 아직 대통령으로 취임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입법부 수장의 자격으로 대통령 권한을 닷새 동안 대행하였다). 
  • 19615165.16 군사정변이 발생하여 대한민국 제2공화국의 국회(민의원, 참의원)가 모두 해산되면서 참의원직 및 참의원 의장직을 잃었다.

 

# 야당 정치인 활동

  • 1961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야당 지도자로서 반박정희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윤보선, 허정, 장면, 이범석, 장택상, 박순천 등 야당의 대권주자로 호명되던 특정인사를 지지하지는 않았다. 
  • 1961년에 연세대학교 명예 총장에 추대되었다. 1962년 세계대학봉사회 한국지부 이사장에 선출되고, 같은 해 미국 뉴욕시의 초청으로 도미하여 뉴욕시 대수장(大受章)을 수여받고 돌아왔다. 1964년 연세대학교 재단 이사회에서 이사에 선임되고, 한국연구원 이사장, 한국역사편찬회 편찬위원, 한글학회 이사에 위촉되었다. 1965년 연세대학교로부터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해부터 크리스찬 아카데미에 관여하여,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고문, 후원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 19661224일에 야당 통합과 대통령 후보 단일화 추진을 위한 위원회가 설치되자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1967년에도 대통령 후보단일화를 놓고 윤보선, 허정 등의 반목이 계속되자 그는 4자회담을 주선, 유진오와 윤보선, 허정 등과 야당 통합 4자회담을 개최하여 대통령 후보로는 윤보선, 당 총재는 유진오로 정하도록 중재하였다. 
  • 1969년부터 국토통일원 고문에 위촉되었으나 삼선개헌안에 반대하였다. 1970815일에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1970323일 최현배가 사망하고 그의 추모단체인 외솔회가 창립되자, 외솔회의 창립에도 참여하였다. 1972년 대한민국 국군에 기독교 선교를 활성화할 목적으로 전군 기독교 신자화 후원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으며, 1977년부터는 전군 기독교 신자화 후원회 고문이 되었다. 전군 기독교 신자화 후원회는 후일 군복음화 후원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 197210월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발표하자 반대하여 국토통일원 고문을 사퇴하고 야당 운동에 동참하였으며, 1974년에는 윤보선, 김영삼, 김대중 등과 민주회복국민선언 서명에 동참하였다. 
  • 1974년 외솔회의 제2대 이사장이 되었다. 74년부터 84년까지는 외솔회 제2대 재단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79년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이 발생하자 관련자로 검찰에 조사받았으나 별 혐의점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 생애 후반

  • 19802월에 최규하 정부의 국정자문회의 위원이 되었다. 1981423일에 전두환에 의해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재선출되었다. 198481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지병인 고혈압과 당뇨병, 심부전증, 폐렴 등이 합병증세를 일으켜 혼수상태에 빠졌다. 5개월간 산소호흡기를 착용하며 입원하였다가 1985111일 사경을 헤매었다. 
  • 저서로는 한국의 사상과 현실 (韓國思想現實)2권과 나의 종강록, 나의 인생관, 영어로 된 한국개신교사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에세이집인 시냇가에 심은 나무등이 있으며, 사후 1986년 부인 최이권이 출간한 그의 신앙간증, 설교 모음집인 백낙준박사 설교 모음집:인생의 닻등이 있다. 
  • 1985113일에 서울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에서 뇌졸중, 고혈압, 당뇨병, 심부전증,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 사후

  • 서울 연세대학교 캠퍼스 대강당과 세브란스 병원에 각각 빈소가 마련되었고 장례위원장에는 윤보선이 선임되었으며, 장례식은 117일 사회장으로 거행되었다. 빈소에는 신병헌 총리 권한대행, 최규하 전임 대통령, 김상협 고려대학교 명예 총장, 이천환 연세대학교 재단 이사장, 유태흥 대법원장, 허정 전 대통령권한대행 겸 총리, 민복기, 이호, 강원룡 등과 그밖에 민주정의당의 권익현, 민한당의 유치송 등 각 정당인사들 2천여명이 당일 방문하였다. 시신은 신촌로터리, 공덕동로터리와 여의도에서 각각 노제를 지낸 뒤 국회의사당을 돌아보고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치되었다. 
  • 1214일에는 연세대국학연구원에서 백낙준박사 추모논총이 헌정되었다. 
  • 1994년 연세대학교에서 용재 백낙준 박사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으며, 1995년부터는 용재 백낙준 기념사업회에서 대학 교수, 학자에게 시상하는 용재 백낙준 학술상을 제정하고, 교수에게 헌정하는 용재 석좌교수 수여를 신설하였다. 
  • 2005년에 연세대학교 교내 단체인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에서 연세대학교 친일파라고 지목당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교육·학술 부문에 지목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 20088월에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으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교육·학술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제17회(1928) 총회장 : 염봉남 [합동]

 충청도 괴산 출신 염봉남 목사 (1875. 9. 27-1036. 11. 17) 는 충청북도 괴산읍에서 출생했다 . 1833 년 한문 사숙 ( 私塾 ) 에 입학하여 송철원 선생 문하에서 천자문으로부터 사서오경에 이르기까지 문리를 터득했다 . 1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