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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8일 금요일

제63회 총회장 : 한병기 [합동]

강원도 희양군 내금강 자락에서 자라

한병기(韓秉奇 1913. 4. 16~2004. 11. 4)목사는 1913416일 강원도 희양군 내금강을 끼고 자리잡은 기독교신앙 가정에서 태어났다. 내금강 산자락에 위치한, 교회가 운영하는 영화의숙(永華義塾)에서 보통학교 과정을 마치고, 14세가 되던 해 일본으로 건너가 고배(神戶)에 있는 중앙신학교 학생이었던 김성태의 주선으로 그곳에서 한인교회인 이마미야(今宮)교회에 출석하며, 야간에 한 소학교에 다니며 정규교육을 받고 난 후, 세미기(成器)상업학교로 진학하여 5년간 다니고 졸업하였다.

이미 유아세례를 받았던 그는 다시 북부교회로 옮겨 이 교회에서 입교(入敎)문답을 하고 주일학교 부장으로 성실하게 봉사하며 헌신하였다.

세이기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게이요대학(關西大學)에 입학하여 조국해방 후를 준비하기 위하여 법학(法學) 전문부 3년과 6년간 법률학을 전공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일본 유학에서 법률공부

한병기는 원래 문학(文學)을 좋아하는 문학도였으나 변호사가 되어 압제받는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쓰임 받고자 신념을 가지고 법률학을 공부했다. 그는 재학 중에 만주국(滿洲國) 고등고시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하지만 세월에 밀리어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천국 건설사업을 위한 목사(牧師)란 지도자로 변신 목회자가 되었다.

그는 신자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종종 언급하기를 나는 육법전서를 성경전서로 바꾸었으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나님 법정의 변호사 자격을 주셨다라고 말했다. 그는 6.25사변으로 북쪽으로부터 월남하여 여러가지 어려운 환경과 난관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내 민족들을 변호하며 하나님나라 확장에 심혈을 다 기울였다.

1945815일 해방이 되어 일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도 하고 몇해동안 교편(敎鞭)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뜻하지 않은 6.25전쟁의 발발로 국군이 북진한 다음 1950128일 남한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남하 하기 어려운 연로하신 부모님과 처자들을 두고 잠시 다녀 오마라는 작별 인사를 하고 눈이 몇길이나 쌓인 산길과 들길을 헤쳐 떠난 것이 지상에서의 54년이란 긴 세월을 목회를 하면서 이산의 아픔을 겪으며 살았다.

그는 홀홀단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동해안을 따라 통천을 거쳐 처가(妻家)가 있는 경상북도 김천에 도착한 것이 19512월 초순 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첫 겨울이었다.

 

일생을 부산 부전교회에 바친 사람

혼자서 잠시 처가에 머무는 동안 금강산 시절부터 친구였던 김형식목사가 부산에서 목회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전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김목사는 그를 반갑게 맞아 주면서 당분간 함께 교회에 머물면서 자기의 목회사역을 돕기를 원했다. 그후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 김형식목사가 신학공부를 그에게 권하였다. 그는 깊이 기도한 후 당시 대구에 피난 와 개교한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전신) 본과에 입학하였다.

평소 할아버지께서 너는 하나님께 바쳐진 몸이라고 말씀하시며 기도해 주시던 음성이 불혹의 나이에 신학교에 입학한 연후에야 할아버지의 하시던 말씀이 문득 깨우쳐지는 것이 아닌가.

대구에서 공부하는 동안 전도사로 섬긴 교회가 대구 문화교회였다. 당시 문화교회 담임목사는 그 유명한 부흥사 박용묵(朴容墨)목사였다. 박목사는 한병기가 일본에서 공부할 때 북부교회를 함께 섬긴 분이었다.

드디어 19537173년을 넘긴 전쟁이 휴전되고 서울의 수복과 함께 대구에 있는 총회신학교도 수도 서울로 올라갔다. 한병기 역시 학교를 따라 서울에 올라가 계속 학업을 마치고 그해 12월에 신학교를 졸업했다. 한병기전도사는 졸업 한달만에 김형식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부산 부전교회의 전도사로 내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당시 김형식목사가 세워 운영하고 있는 복음학원(福音學院)과 성민중학교(聖民中學校)를 맡아서 어렵고 힘든 젊은이들에게 앞날의 희망을 주기위해 교육사업에도 힘을 썼다.

한병기전도사는 1955719일 당시 경남노회 노회장이었던 노진현목사로부터 목사안수를 받고 부전교회의 청빙을 받아 부목사로 목회를 시작하였다.

19561월 부전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김형식목사가 사정에 의해 사임하게 되자, 부목사로 있던 한병기목사는 복음학원의 일을 내려놓고 목회사역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이듬해 195711월 부전교회 위임목사(委任牧師)로 취임, 본격적인 부전교회 담임목사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한목사는 목회를 하는 가운데서도 배움에 대한 열정이 있어 19663월부터 총회신학대학 대학원에 진학, 학국신학계의 태두(泰斗) 박형룡(朴亨龍)박사 밑에서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을 전공하고 학업을 마쳤다.

한병기목사는 교정(敎政)에 참여하여 여러가지 모범적인 역사를 이루어 내기도 하였다. 그 한 예로 그는 총회에서 70세 정년제를 발의했고 자진해서 70세에 은퇴 함으로 선진적 사고와 모범적 실천을 보여주었다.

한목사는 목회자로 소명을 받은 후 전도사, 강도사, 부목사와 담임목사직을 두루 겪으면서 30년의 참목자의 삶 부전교회 성도들 뿐 아니라, 부산 경남지역을 뛰어넘어 교단적인 차원에서도 모범적인 목회자로 지도자적인 삶을 나타내 보여 주었다.

부산교계와 일반사회로부터도 그를 가리켜 개신교회 지도자로 성자(聖者)적인 삶을 산 지도자로 회자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의 성실함과 진실된 목회자로서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청빈과 섬김 그리고 성결한 삶

그가 평생을 섬겼던 부전교회 80년사는 그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부전교회 80년사 p.121).

한병기목사의 생애를 단적으로 표현 한다면 청빈과 섬김 그리고 성결(聖潔)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삶은 그대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에 그 무게를 더해 주었다.”

한병기목사는 개혁주의(改革主義)에 대하여 스스로 정의 하기를 개혁주의(Reformism)란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여러가지 진리와 사상을 조직하고 체계화 한 것으로 성경의 권위, 하나님의 주권, 구원의 예정, 이신득구, 성도개위제사 그리고 바른교회관, 세례관 등을 내용으로 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한병기목사가 평생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에 서서 목회를 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먼저는 그의 저서들이고, 다음은 그의 장례예배 때에 선포된 강론과 조사(弔辭)들이다.

2004118일 그의 천국환송예배에서 조사를 한 증경총회장 이성택목사는 목사님의 지() () ()로 다듬어진 신앙인격의 모습과 신학과 교리로 조화된 강론과 저서들은 고 박형룡박사님의 수제자로서 한치의 손색이 없는 주옥같은 성업(聖業)이었습니다.”라고 하였으며, 대전 새로남교회 오정호목사 역시 진정한 목회자로 신학자이셨던 한병기목사님! 삶으로 신학을 하시고, 몸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도(正道)를 보여주셨던 목사님! 평생 칼빈선생을 사모하셨기에 얼굴도 칼빈을 닮으신 목사님!”이라고 그의 신앙과 인품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그가 남긴 저서들을 보면 진리와 사랑’‘창세기 강론’‘출애굽기 강론’‘성경 66권의 그리스도’‘성경인물 강론’‘개혁주의 강론’‘기독교는 어떠한 종교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학적 교리’‘남아있는 그리스도의 그루터기10권이 넘는다.

강단을 지키며 365일 새벽설교와 52주간의 주일설교 및 수요일 설교준비에 바쁜 일정을 보내야 한는 목회자로써 따로 신학적인 글이나 성경을 강해하는 책을 집필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한목사의 저력이나 그의 연구자적인 정신자세가 돋보이는 저작들이라 생각된다.

그에게 아쉬움이 있다면 민족의 비극 전쟁의 상처가 치유되지 못한 상태와 북에 두고온 부모처자와 가족들을 생시에 만나 보지 못하고 간 그의 통일염원이 그저 아쉽기만 하다. “주여 어서 이 민족의 통일을 성취시켜 주소서라는 기도는 그가 소천하기 전까지 가슴 속에 지닌 기도의 제목이었다.

2020년 7월 27일 월요일

허헌 [許憲, 1885.7.22.~1951.8.]

허헌 [許憲, 1885.7.22.~1951.8.]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법조인 출신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치가이다. 그는 이인, 김병로와 함께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던 변호사로,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 유명했다.

# 출생과 소년기

허헌은 1885년 함북 명천군 하우면 하평리에서 향반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510세 때 아버지를 따라 한성부로 올라와 광화문 인근에 있는 집에서 살았다. 부친이 동향인 이용익과 가까워서 어렸을 때부터 이용익의 손자 이종호와 가깝게 지냈다. 그리고 신설된 관립재동소학교에 입학하였고, 1899년에는 한성중학교로 진학하여 신학문을 익혔다. 이 무렵 허헌의 아버지 허추(許抽)는 궁내부 경위원에 근무했다고 한다. 그런데, 허추는 건강이 나빠져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기로 결정하고 아들 허헌을 이용익에게 맡겼다. 어린시절 허헌은 이용익의 사랑채에 기거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아버지 허추가 병사하고 부친상 3년상을 치르고 난 뒤 허헌은 견문을 넓힌다는 생각으로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트크에 다녀왔고 돌아오는 길에 청진의 친지인 강씨를 찾아가 다시 한성부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재력가인 강씨는 당나귀 두마리와 엽전 한 꾸러미를 학자금으로 주었다고 한다. 그가 고향인 함북 명천에 돌아오자 어머니는 장가 들기를 권해 함흥에 사는 정보영이라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다. 정보영에게서 얻은 자녀들 중 딸 허정숙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하였고, 허정숙은 후일 일제 강점기의 여성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로 활동한다.

그는 학업에 계속 종사하여 경성으로 올라갔고, 가정의 생계는 부인 정보영이 꾸려나갔다. 그 후 뒤늦게 유덕희(柳德禧)와 재혼하여 딸 허근욱과 아들 허선욱, 허종욱, 허영욱, 허선욱, 허기욱 등을 더 둔다.

# 수학 시절

그리고 허헌은 아내를 데리고 한성부로 와서 한성외국어학교에 입학해 독일어를 공부했고 영어와 일어도 익혔다. 그는 국제법을 전공할 결심으로 외국어를 배웠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많은 동료들을 사귀었는데, 이용익의 손자 이종호와 친분이 두터웠고 서북출신인 이갑, 이동휘등 여러 명사들과도 인사를 나누며 안면을 넓혔다 한다. 그는 러일전쟁이 발발한 해인 1904년 외국어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잠시 지계아문과 규장각, 법무아문에서 하급관리로 임명되어 근무했다.

19054월 이용익이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고, 이용익의 주선으로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해 낮에는 법무아문 주사로 근무하면서 야간에는 학교를 다녔다. 그의 관심은 법학 이론에 있었다. 그는 이때부터 공정한 사회를 만들려는 일념으로 법률가의 꿈을 키워갔다. 1907년 보성전문학교를 제1기로 졸업하고 일본으로 도쿄로 유학을 결심, 23세 나이에 가족을 남겨두고 메이지 대학교(明治大學) 법학부 법과에 입학했다. 그는 열심히 학업을 닦으면서 대한흥학회 등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해 평의회 의장을 맡았다. 당시 도쿄에는 김성수, 송진우, 이광수, 백남훈 등이 유학생 신분으로 여러 활동을 벌이고 있었고, 허헌은 이들과 함께 한일병합을 반대하는 공작을 벌이기도 했다. 1908년 메이지 대학을 법학부 법과를 졸업하고 일본의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19087, 광무변호사법에 의거한 제1회 대한제국 변호사 시험에 응시, 합격하여 대한제국 최초의 변호사 11호로 등록했다. 보전 법과 동기인 옥동규와 함께 합동 법률 사무소를 개소하고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1909년 평리원 판사에 맞서서 소송을 진행하다가 상관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변호사 제명 처분을 받았다. 한국 법조사 최초의 변호사 징계 제명 사건이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허헌은 '식민 지배아래 변호사가 무슨 뜻이 있느냐?'며 낙향하고 은둔하였다. 이후 그는 몇 안 되는 활동적인 사회운동가로서 주로 독립운동가들의 변호를 전담하다시피 하면서 독립운동단체와 연관을 맺었다.

# 일제 강점기 활동

# 독립운동과 무료 변론

1919년 조선변호사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193월의 3·1운동은 그를 대표적 항일변호사로 만들어 주었다. 3.1 운동 당시 허헌은 민족대표 33인과 관련자 14인을 포함한 47인에 대한 변론을 맡았다. 그는 일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해박한 법 이론 지식으로 피체된 3·1운동의 지도자들을 변호하여 일제를 당황하게 하여 유명해졌다. 또한 체포된 49인에 대한 공판 때 공판정에서 불기소수리(不起訴受理)를 제출하기도 하여 법정에서 총독부 형사들이 반발하는 등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19년 조선변호사협회장으로 선출된 허헌은 특히 손병희 등 3·1운동 민족대표 47인을 변호하면서 명성을 날렸다. “조선독립을 주창 선언한 것은 민족을 위한 정의 인도에 근거하여 행동한 것으로서 범의가 없으며, 따라서 처벌할 필요가 없고 무죄가 되어야 한다며 일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해박한 법이론과 지식으로 3·1운동 지도자를 변호해 일제에 맞섰다.

그 뒤 허헌은 전국적 명성을 안고 의열단, 조선공산당 사건 등 무료 변호를 맡는 등 일상적인 변호사 업무 외에 여러 사업을 벌였다.

변호사 협회 단체를 조직해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2010월 경성조선인 변호사회 회장으로 재직 중에 북경에서 개최된 국제 변호사 대회에 참석했다. 노동자, 빈민층을 위한 변호 활동에 관심을 두고 나섰으며, 노동자들의 단체 행위에 대한 부당 해고 문제나 임금 투쟁에 대한 문제, 그리고 그 밖의 사회 문제로 인한 재판에 변호사로 활동하여 이 분야에서 상당한 신망을 얻었다.

192011월 동아일보 주주로서 감사가 되었다. 허헌이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은 것은 창간시 8천여 원의 거금을 출자하고 감사(1921.91924.5)를 맡으면서였다. 192311월에는 당시 경영이 어려웠던 보성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244월 송진우가 동아일보사장직에서 물러났을 때는 한 달간 사장 직무대행을 맡았고, 이어서 1930년까지 취체역(이사)으로 동아일보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1920년대에는 변호사 업무와 동시에 교육사업에도 열중했는데, 1921년 함흥영생학교 교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이어 이상재등과 함께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벌였는데, 총독부에서 인가를 내주지 않았지만 경성제국학 예과를 설립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외에도 여성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여성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차미리사를 도와 근화학원 설립에 나섰고, 동아일보가 창간될 때에는 8000여원의 거금을 출자하고서 감사를 맡기도 했다.

1923년 경성부 종로구 인사동 75번지에 건물을 마련하고 김병로, 이인 등과 함께 형사공동연구회(刑事共同硏究會)를 조직하였다.

19233월 민립 대학 기성회 결성에 참여하고 중앙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311월 보성 전문 제7대 교장에 취임했으며, 1924년 당시 경영이 부실한 보성전문학교 교장에 취임과 조선인변호사 회장을 겸임 하면서 민족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그 해 4월말에는 송진우가 사장직에서 물러났을때 동아일보 사장직무대행으로 잠시 맡기도 했다.

19254, 조선 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보내어진 조동호, 조봉암이 19282월 상하이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자 이들을 위하여 서울 경성지법에서 무료 변론을 해주었다. 이 일로 허헌은 조선 국내뿐만 아닌 일본에서도 알려지게 된다.

한편, 이무렵 허헌은 중도좌파적으로 사회주의 성향으로 기울게 된다. 박헌영을 비롯한 조선공산당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동조자적인 변론, 공산주의자들과의 폭넓은 교우, 그리고 딸 허정숙과 사위 임원근이 모두 조선공산당 간부였다는 점이 그를 사회주의 성향으로 인도하게 되었다.

# 사회 활동

그가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회활동 분야는 부당한 해고와 불이익을 당하는 조선인 민간인, 조선인 지식인 조직체와 문필활동,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변호와 법조문 관련 내용, 인간의 기본권, 노동자들이나 빈민층을 위한 변호활동 등이었다. 특히 노동자들의 노동권리 문제와 임금 인상 문제, 그리고 그 밖의 사회문제로 인한 재판에 변호사로 활동, 무료 변론으로 여러번 승소하였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는 상당한 신망을 얻었다.

그는 노동자들의 단체행위에 의한 부당해고문제나 임금투쟁에 대한 문제에 앞장서서 변호하였으며, 이들 노동자들이 반정부나 반조선총독부 성향이 아님을 들어 부당 해고를 당한 조선인 노동자들의 복직과 배상, 임금 인상 문제의 타협 등을 성사시켜 한인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와 권리 향상에 기여하여 명성이 높았다. 한편 좌우합작의 독립운동단체였던 신간회 등이 결성될 때는 좌측의 대표로 참여하였다.

# 세계일주 여행

1926년 허헌은 무엇인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더욱 견문을 넓혀야 한다는 의지에서 구미(유럽과 미국) 유학의 뜻을 품고 준비를 서둘렀다. 맏딸 허정숙은 배화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에 돌아와 있었다. 허헌은 자신의 딸을 여성운동가나 지도자로 키우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미국 유학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투옥되는 등의 일이 발생하자 당국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미국으로 갈 때 딸 허정숙을 데려갈 결심을 한다.

그리하여 가족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허정숙과 함께 미국 가는 길에 올랐다. 그는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뉴욕 등을 6개월 동안 돌아보고 나서 딸을 미국에 남겨두고 발길을 유럽으로 돌렸다. 그는 미국 유학의 꿈을 접고 여러 나라 사찰에 나선 것이다. 그리하여 아일랜드, 영국, 프랑스, 스위스, 독일, 소련, 중국 등 대륙횡단 여행을 6개월동안 하고 돌아왔다.

당시 대륙횡단 여행을 하는 사람이 손에 꼽힐 정도로 흔치 않아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의 여행기는 삼천리 잡지에 3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때 미주 지역을 여행하면서 캘빈 쿨리지 대통령을 만나보기도 했다.

# 신간회 활동

귀국한 이후 19272월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자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피선되어 민족단일당(民族單一黨) 결성과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신간회에서 허헌은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청년운동, 형평운동 등의 단체와 연계를 추진해 강연을 여러번 나서면서 활동했다. 그러나 신간회 서울지회장에 선출된 조병옥(趙炳玉)이 허헌의 취임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고, 송진우의 신간회 가입이 무산되면서 여기에 반발한 신간회 광주, 목포 등의 지회가 이에 가세하여 내분이 계속되었다.

그의 신간회 활동은 한때 국내의 합법적인 독립운동 단체, 자치 운동 단체로 지향하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었다. 그는 자치 운동도 일부 수용할 의사를 밝혔지만 좌익의 강한 반대와 배타성, 종파주의적 성격과 코민테른의 지령으로 결국 신간회는 분해, 해산되고 말았다. 1927년 보성전문학교 교장이 되었다.

1928년 윤치호와 함께 계명구락부의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그해 22일의 계명구락부 회의에 참석, 1.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실행할 것, 2. 족보를 폐지할 것을 의결하였으며, 이날 회의에서 그는 계명구락부 평의원 14인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2911월 광주 항일 학생운동이 일어나자 허헌은 광주학생들의 항일정신을 전국민에게 알리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기 위해 경성부 안국동 네거리에서 신간회가 중심이 되어 민중대회를 열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는 등 19321월까지 4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옥중에 허헌의 아내 정보영이 죽었다. 그리고 감옥에 출소하자마자 일제는 변호사 자격을 박탈했다. 변호사 자격 박탈된 그는 대동광업주식회사의 중역을 맡았고, 경성부 자택에서 은신하며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했다. 한편, 딸 허정숙은 '중국 으로 망명을 떠나겠다.'고 하자 허헌은 허락했다. 허정숙은 그 뒤 중국 공산당과 제휴한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항일조직인 조선독립동맹에 참여해 싸우다 해방이후 북한으로 입국한다. 그러나 김성수, 송진우, 이만규 등의 배려로 계속 보성전문학교에 출강할 수 있었다.

# 일제강점기 말기

1930년대에 이르러 교수 월급으로 생계가 궁핍해진 그는 부동산과 광산업에도 뛰어들게 되었다. 그는 윤치호나 김성수, 송진우 등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처지까지 가기도 했다.

일제 말기 1943년 단파방송 밀청 사건에 연루되어 연행되었다. 당시 허헌은 58세 나이로 심한고문을 받았고 딸 허정숙이 망명한 혐의도 죄명에 포함되었다. 그는 2년 정도 옥고를 치르다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19454월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그 뒤 허헌은 재취 아내의 처가가 있는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의 처가로 내려가 달천 온천에서 휴양을 하면서 해방을 맞이했다.

19454월부터 4개월간 신천에서 요양하였다.

# 해방 정국에서

# 건준과 인공 내각

1945815일 일제 패망과 여운형의 주도아래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됐다는 소식을 들었고, 허헌이 황해도 신천군에서 요양생활 했을 때, 건준 위원장 여운형은 사람을 보내 허헌을 초치하고 건국준비위원회 참여를 당부했다. 이무렵 허헌은 요양 중이었으나 흔쾌하게 승낙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의 기록 의하면 그는 '나는 전부를 여선생께 바치겠다. 나는 선생을 믿고 모든 지혜를 짜서 돕겠다.'고 했다 한다.

한편 허헌은 한국민주당 출범 초기까지만 해도 한민당에 대한 비난은 자제했지만 갈수록 허헌의 공개연설은 조선공산당 옹호와 한국민주당 비난의 색채를 점점 짙게 띠어갔다. 그는 일제치하에서 항일독립운동은 거의 상당수가 공산주의자들이 수행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이런 점에서 "우리는 조선공산당에게도 감사해야 한다"고 역설한뒤 한민당이 건준에도 협력하지 않고, 친일파나 테러리스트들까지도 옹호하며 조선의 완전독립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계열의 건준 진출에 불만을 품던 안재홍을 찾아가 여러 번 설득하였으나 안재홍은 듣지 않았고 곧 탈퇴하고 만다.

94일 건준 전체회의에서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임되었고, 이어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준비했다. 허헌은 인민위원으로 참여하면서 한민당 계열과는 달리 '임시정부 추대론'을 부정하고 인민공화국을 준비해야 한다는 현실관을 보였다. 194597일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국무총리에 선임되었다.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가 발표되자 그는 "이제는 임정의 법통을 따를 것이 아니라모스크바 의정서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남북을 통틀은 조선인의 임시정부를 세우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렇게 하기 위해 좌우익이 모두 모스크바 의정서를 지지하는 가운데 미소공동위원회의 활동을 적극 돕자고 제의했다.

# 민족주의 민주전선

1946215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떠난 김원봉, 김성숙, 장건상, 성주식 등이 민족주의민주전선에 참여할 때 여운형, 백남운, 박헌영, 김원봉과 함께 민족주의민족전선의 공동의장에 추대되었다. 이어 민주주의민족전선 수석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민족주의민주전선 개회사에서 허헌은 임시정부가 주최하는 비상국민회의를 염두에 두며 법통이라는 유행어가 있는데 이는 옳지 못하다. 무엇이 법통이며 법통을 주장하는 자가 누구며 김구 일파가 법통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라며 비난하였다.

# 독립 정부 수립 활동

허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공개적으로 부정하였다. 임시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승인받지 못하였으며, 더구나 임정 간부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했음을 주지시키며 임정이 법통을 내세우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임정 법통 부정 이후 그는 극우단체의 공적으로 성토되었고, 테러의 주된 표적이 되기도 했다. 그는 우익 청년단체의 습격과 테러를 피해 여러번 거처를 옮겨다녀야 했다. 한편, 허헌은 해방 정국 정치정당에 가입하지 않고 개인자격으로 활동했다.

허헌은 감옥에서 얻은 병의 후유증이 겹쳐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민전 소집일에는 항상 참석하는 등의 정력을쏟았으며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이래가지고 무슨 건국사업을 하겠느냐", "이렇게 열의가 없어서 독립국가를 운영해 나갈수 있느냐"고 야단치곤 했다.

# 체포령과 은신

194611월 남조선로동당 결성에 참여하였다. 남조선로동당이 결성된 뒤 여운형이 당수직에 앉았다가 박헌영과의 갈등으로 물러나자, 그는 1946122일 제2대 남로당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이무렵 허헌은 박헌영 노선을 지지하면서 따랐다. 이후 1947811일 미군정 당국은 남로당 당수 허헌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면서 남한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불법이라고 선언하였다.

박헌영과 허헌에 대한 수배와 탄압을 피해,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편을 나누어서 움직였고, 허헌 역시 경찰과 미군정, 우익 청년단체원의 눈을 피해 밤중에 수시로 거처를 옮겨다녀야 했다.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위당시 사진
오른쪽부터 여운형, 김규식, 이묘묵, 말리크,
테렌티 스티코프(소련군정 사령관), 허헌(맨 왼쪽)

# 남북협상 이후

19484월 남북협상을 위해 남로당의 리승엽 등과 함께 38선 이북으로 갔다가 내려오지 않았으며, 그해 825일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제정의 책임을 맡은 최고인민회의 헌법위원회 위원으로도 선출됐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제정 후 9월에 최고인민회의 의장에 선출되었다. 동시에 그해 10월부터는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직을 겸임하였다. 4872일부터 75일까지 열린 제2차 남북 지도자회의(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본회의에 참석했다.

1949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에 당선되고, 19518월 다시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되었다. 1951년에 병사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같은 해 816일 청천강에서 사고로 익사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장례식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장으로 치러졌다.

# 사후

195197일 평양 모란봉 지하 극장에서 장례식을 마친 뒤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가족 관계

차녀 허정숙(본명 허정자)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 유학 중 사회주의를 공부하고 조선에서 박헌영-주세죽 부부, 조봉암-김조이 부부와 함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그녀는 해방 후에 이북 소군정 지역에서 활동하였고, 연안파 간부 활동을 하다가 김일성 계열로 넘어가 북한 고위정치인이 되었다.

딸 허근욱은 한국전쟁 중 월남하여 대한민국에서 소설가로 활동하다가 사망하였다.

  • 할아버지 : 허조(許租)  
  • 아버지 : 허추(許抽)
  • 어머니 : 
  • 동생 : 허훈(許壎)

  • 부인 : 정보영(다른 이름은 정긍자(鄭兢子), 1884- 1932)
  • : 요절
  • : 허정숙(許貞淑, 본명은 정자(貞子), 1902716~ 199165)
  • 사위 : 임원근, 허정숙의 첫 번째 남편
  • 외손자 : 임경한(처음 이름은 임표, 1924- ?)
  • 사위 : 송봉우, 허정숙의 두 번째 남편
  • 외손자 : 송길한(1926- 1932)
  • 사위 : 신일룡, 허정숙의 정인
  • 외손자 : 신영한(19305- ?)
  • 사위 : 최창익, 허정숙의 세 번째 남편
  • 외손자 : 이름 미상(1942- ), 아버지 최창익이 숙청된 후 어머니를 따라 성을 허씨로 바꾸었다.

  • 부인 : 유덕희(柳德禧, 다른 이름은 유문식(柳文植), 1904년 음력 615- 19871027)
  • : 허근욱(許槿旭, 1930328~ 2017325)
  • 사위 : 박노문(朴魯文, 1922- ?, 다른 이름은 박수양(朴洙陽))
  • 외손자 : 박일규(朴一圭, 1952~ , 무용가, 서울예전 교수)
  • : 허선욱(許善旭, 음악가·하프 연주자, 193531- )
  • 아들 : 허영욱(許暎旭), 193729- )
  • 아들 : 허종욱(許鍾旭), 193 ~ 사망
  • 아들 : 허성욱(許聖旭), 194282- 2013210)
  • 아들 : 허기욱(許琦旭), 19468- )

# 평가와 비판

# 평가

그의 사상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데, 대체로 마르크스주의나 공산주의자라기 보다 사회주의에 공명하는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평가된다. 그가 공산주의자와 비타협적이었던 신간회에서 활동과 김병로, 이인 등 함께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던 변호사로 '3대 민족인권 변호사'로 활동했던 것은 그의 사상이 양자를 아우를 수 있는 민족주의에 기반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작가 정경모는 그가 '해방될 때까지 비전향으로 일관한 고매한 인격자로 알려졌다'고 평하였다.

# 비판

해방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론을 정면으로 비난했었다. 이 때문에 한민당과 한독당등 비롯한 극우단체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었다.

# 기타

그는 해방 정국에서 '임정법통론'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허헌은 "법통이라는 유행어가 있는데 이는 옳지 못하다. 무엇이 법통이며 법통을 주장하는 자가 누구인가? 김구 일파가 법통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임시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승인받지 못하였으며, 더구나 임정 간부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이들이 국제사회 승인을 받았다면 미국이 무기를 제공했을 것이다. 임정이 법통을 내세우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허헌은 중도좌파 성향으로 그의 통일론은 '중도적으로 통일을 고수하되, 좌파 주도의 통일론'을 주장했다.

# 어록

  • 나는 보성전문학교 교수, 변호사, 동아일보사 기자 등 세 가지 명함을 들고 구미를 시찰했다. 어떤 명함이 가장 효과적이었느냐 하면 신문 기자 명함이었다. 구미에서 신문 기자처럼 권위 있고 자유스러운 것은 없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무관의 제왕이었다.”
    - 19348월호 신동아기고.
  •  “3.1 운동은 우리 조선 민중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항을 가장 집중적으로 표시한 역사적인 전 민족적 투쟁이었다. 그러므로 3.1 운동의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 수립을 다짐하고 그 목표를 향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는 뜻이다.”
    - 194633해방일보기고.
  • 우리의 해방은 우리의 자력으로 된 것이 아니므로 국제적인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미소공동위원회를 거부할 것이 아니라 도와야 한다.”
    - 19467월호 인물평론기고.
  • 테러에는 테러로 대답해야 한다.”
    - 1949625일 연설.
  • 조선 인민은 38선을 국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지금도 인정할 수 없다.”
    - 19506인민기고.

제17회(1928) 총회장 : 염봉남 [합동]

 충청도 괴산 출신 염봉남 목사 (1875. 9. 27-1036. 11. 17) 는 충청북도 괴산읍에서 출생했다 . 1833 년 한문 사숙 ( 私塾 ) 에 입학하여 송철원 선생 문하에서 천자문으로부터 사서오경에 이르기까지 문리를 터득했다 . 1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