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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8일 금요일

제69회 총회장 : 최훈 [합동]

순교자적 삶을 산 재건파 출신 모범적 목회자

 

평양 대동강변에서 출생

최훈목사(催薰 1926. 9. 26~2008. 4. 28)는 평안남도 평양시 유리(柳里)에서 부친 최병록(催炳錄)과 모친 황병선(黃炳善) 사이 2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손위로 누님이 한분 계셨고, 조부님은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로써 일찍 개화한 어른이었다.

최훈목사가 태어나 자란 곳은 평양의 최남단이며 대동강 한 가운데 있는 양각도를 건너가는 나룻터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최목사는 월남하기 몇년 전까지는 거의 고향에서 살았다. 조부님(최재식)은 고향마을에 송산리교회를 세웠는데 이 마을 출신 명사로는 연세대 김형석교수와 총신대 김득룡박사가 있다.

부친 최병록은 숭실대학 출신이었으나 최목사가 7살되던 해에 53세의 일기로 작고해 최목사는 어머니와 조부의 슬하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고향 송산리에 있는 국민학교였던 신망학교(信望學校)에 입학하여 6년의 과정을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경성상업학교에 입학해 졸업한 후 고향으로 내려가 평양철물조합에서 근무했다.

일제 말엽에는 징병을 피하기 위해 평양서기산 밑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44부대 군속이 되어 부대가 직영하고 있던 자활농장의 통역으로 일하기도 했다.

 

해방 후 교사직 사면하고 재건교회 설립

최목사가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은 해방 이후였다. 19458·15광복이 되자 고향 송산리에 돌아가 송산국민학교(오늘의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 평생 신앙동지로 함께 활동했던 김창인(金昌仁)전도사와 이창환전도사를 신앙의 선배로 만났다.

최목사는 교사직을 사면하고 고향에 재건교회를 설립해 전도사가 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소속 전도사가 재건교회 전도사가 된 배경을 보면,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한 후 교회는 사실상 영력(靈力)을 상실하였다. 교회가 신앙의 정조를 잃어버리게 되자 뜻깊은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일제당국의 갖은 압박과 시련 속에서 고통을 당하며 투옥되기도 했다. 적게는 몇개월씩 길게는 6,7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지도자들과 신자들에겐 이만저만 실망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출옥한 성도들이 볼 때 이미 기성교회와 지도자들은 기댈 만한 지도자가 아니고 변질된 사이비지도자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신사참배로 일제와 영합한 교권주의자들은 뉘우치기는 커녕 오히려 당신들은 옥에서 고생했지만, 우리들은 교회를 지키기 위해 교회밖에서 여러분 못지 않은 고난과 역경을 겪었노라고 큰 소리치는 것이었다. 해방을 맞은 청년 최훈에게도 몹시 실망스러운 현실이었다.

정의감이 남달리 강했던 그는 성경대로 믿고 살아야겠다는 순수한 신앙을 갈망하였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앙의 절개를 지킨 출옥한 성도들의 신앙공동체인 재건교회에 출석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김일성 일당이 북한에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굳히기 시작하자 교회에 대한 탄압과 핍박의 손길이 미치기 시작했다.

1947년 최훈은 고향 망경대에서 숙청 당한 후 평안남도 순안 원일리 28번지로 거처를 옮겼다. 그 곳에서 재건교회의 담임전도사가 되었다. 청년 최훈전도사는 그 곳에서 일생을 온전히 주님께 바치기로 생각을 굳힌다.

 

공산당에 체포돼 집행유예 2

당시 청년 부흥사로 서북지방에서 맹활약하고 있던 김창인전도사도 고향 평북을 떠나 황해도 황주(黃州)에서 재건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그곳을 떠나 서울로 월남하게 되자 그 교회는 후임으로 최훈전도사를 청빙하게 되었다.

최훈전도사가 황주에서 전도사로 일할 때는 북한의 김일성 정권의 권력이 강회되고 있던 때였다. 동시에 공산당이 제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교회에 대하여 가일층 감시와 통제가 강화되었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훈전도사는 강단에서 소신있는 설교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불온한 전도사로 사상이 다른 자로 낙인이 찍혀 있었는데, 그의 설교를 필기해 상부에 보고한 정치보위부 요원의 고발로 19492월 투옥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법정에 선 최훈전도사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이때의 경험이 그후 그의 목회생활에 큰 밑거름으로 작용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하겠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인생에 있어서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깨닫게 된 것이다. 당국의 감시 속에서 긴장된 생활의 연속이었다. 언제 다시 영어의 몸이 될지 모르는 삶의 연속이었다. 그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을 가지고 평북 강계(江界)로 가서 장백산맥 줄기에 위치한 향내산에서 50일간 산기도를 하면서 영적으로 무장하게 되었다. 이러던 참에 정말 예기치 못한 6·25동란이 발발해 황주의 재건교회는 지하로 숨어들고 말았고, 최훈전도사도 교회를 사임하고 피신해야만 했다.

그냥 버티다가는 인민군대의 입대에 반대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교회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로 산속으로 피난했는데 그곳에 숨어든 내무서원에게 발각되어 총살 직전에 UN군의 공중 폭격기의 폭탄 투하로 구사일생으로 4개월간 산속을 헤매면서 생사의 가름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평양 떠나 서울로 월남

1950125일 평양을 떠나 129일 서울에 도착해 재건교회를 찾아갔다. 당시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있던 재건교회에서 고흥봉(高興鳳)목사를 만났다. 고목사는 한상동 이기선 목사와 함께 옥고를 치룬 동지였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남으로 다시 밀려 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1·4후퇴였다. 고목사와 함께 교인들을 이끌고 항도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곳에서 평생 신앙을 함께 할 멘토로 믿음의 선배 이순남권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권사 역시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옥고를 치룬 신앙인이었다. 이권사는 최훈보다 일찍 월남하여 고흥봉목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권사였다. 이때 최훈전도사를 만나 부산 영주동교회에서부터 서울수복 후엔 서울 충현교회 그리고 동도교회에 부임하여 이권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믿음의 어머니로 함께 했다.

부산에 도착한 후 얼마 안되어 김해시내에 재건교회 개척 전도사로 사역하면서 고려파 교회와 직·간접으로 목회적인 접촉을 갖게 되었고 한국교회를 보는 시각이 넓어졌다. 재건교회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 김해재건교회는 나중에 고려파에 가입해 김해중앙교회로 발돋움하게 되었고, 자신은 부산 영주동에 새로 교회를 개척하여 사역하면서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부산 고려신학교에서 개혁신학 수립

당시 고려신학교에는 한상동목사와 박윤선목사가 개혁신학의 수립과 한국교회의 정화를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 하고 있었고 그동안 받은 은혜와 신앙생활에서 쌓은 경험을 조화시켜 가면서 그것을 논리적으로 신학적으로 체계화 할 수 있었다.

1956년 고려신학교를 졸업한 최전도사는 그해 46일 신앙의 선배이며 과거 재건교회 전도사 시절부터 친분관계가 있던 충현교회 김창인목사의 부름으로 담당전도사로 부임하였다. 충현교회는 서울에 고려파 교회로써 큰 건물을 가진 유일한 교회였다. 맡은 부서는 중·고등부와 대학부 학생회였다. 이들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시야를 좀더 넓혀야겠다고 느꼈다.

나이 많은 최전도사는 자존심을 버리고 숭실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는 용기를 발휘하였다. 이것은 최전도사가 학문을 더 배우겠다는 겸손과 향학열의 발로이기도 하였다. 한편 역사의 격변기를 겪으면서 싹트기 시작한 그의 예리한 역사의식의 발로이기도 했다. 그가 숭실대학에서 역사를 배우지 않았다면 후일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학위논문으로 한국재건교회교회사를 집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숭실대학에서 우호익교수, 김양선교수, 서양사의 대가 김성식교수 등의 강의와 지도로, 재건교회와 한국교회의 모습을 새로이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길렀고 단단한 학문의 기초도 쌓을 수 있었다. 19612월 숭실대학을 졸업했다. 그의 졸업 5개월을 앞두고 평생 몸담아 목회한 동도교회로부터(당시 강도사) 청빙을 받아 19601025일 동도교회로 부임하여 원로가 되기까지 뜨거운 충성을 다한 모범적인 목회자였다.

그의 교계 활동으로는 모교의 강사를 비롯 숭목회 회장, 한국외항선교회 회장 및 이사장,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 사무국장(1982)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 회장, 대한민국평화통일자문위원, 한국항공선교회 이사장, 미주총신대 이사장, 평양노회 공로목사, 숭실대 모교를 빛낸 숭실인상, 국민일보 선교대상(1997),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1998) 등이 있고, 이를 어여삐 여기신 하나님은 그가 몸담아 사역했던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수장 자리인 총회장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지난 2015428일에는 그가 섬겼던 동도교회 예배당 본당에서 그가 떠난 후 7번째로 동도교회 성도들과 생시에 함께했던 많은 추모객들이 모여 그의 유지를 기리고 있는 모임에 참석, 새삼 고인의 신앙과 덕망을 느낄 수 있었다.

필자는 7주기에 설교를 맡은 대전중앙교회의 원로요 증경총회장 인 최병남목사는 추모설교에서 로마서 147~8절을 읽은 후, 최훈목사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 순교자적인 삶을 산 사람 생명을 건 목회와 신앙 최선을 다한 삶 믿음과 성령에 의존했던 삶이라고 했다.

 

[출처 : 교회연합신문]

2020년 7월 28일 화요일

최승만 [崔承萬, 1897.1~1984.12.25]

최승만 [崔承萬, 1897.1~1984.12.25]


[링크]

 

언론인교육자. 안산시 고잔동 당골(堂谷) 출생. 1915년 보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1917년 일본 동경관립외국어학교 노어과(露語科)에 입학하였다. 그는 당시 동경 유학생 중 지도적 위치에 있던 최팔룡(崔八鏞) 등과 1918년 여름방학 때부터 자주 만나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추진, 마침내 191928독립운동을 거사하는 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1918년 동경에서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위원, 이듬해 [창조(創造)] 동인(同人)으로 활동했고, 1922년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의 기관지 월간 [현대(現代)]의 주간(主幹)을 지냈다. 1930년 미국 스프링필드 대학에서 B·S학위를 취득하고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 기관지 월간 [청년(靑年)]의 주간을 지냈고, 1934[신동아(新東亞)]의 잡지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368월 일장기 말소사건(日章旗抹消事件)으로 퇴직하였다.

 

해방 후에는 1945년 미군정청 교화국장, 1948~1952년 연희대학교 교수로 활동하던 중 1950년 한국전쟁으로 처와 세 딸이 납북되었다. 1951년 제주도지사, 1952년 제주대학 초대학장을 거쳐 1954년 이화여자대학교 부총장을 역임하였다. 1962년 대한소년단 부총재, 1962년 중앙여고 이사, 1963년 감사를 지내는 등 교육사업에 투신했고, 1966년 동경에서 한국기독교청년회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귀국, 1984122587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언론인교육가. 일제강점기에 기독교청년회(YMCA)와 여러 잡지의 발행에 관여했으며 815해방 후에는 교육가로 활동했다. 본관은 해주(海主). 호는 극웅(極熊)극광(極光). 아버지는 문현(文鉉)이다. 보성중학교와 경성 중앙YMCA 영어과를 졸업했다. 1917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 외국어학교 러시아과에 입학했다.

 

1918년 도쿄 조선유학생학우회에 참여하여 편집위원으로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의 발행에 관여하는 한편, 유학생들의 문예잡지였던 [창조]의 동인으로도 활동했다. 1923년 도쿄 도요대학[東洋大學] 인도윤리철학과를 졸업했으며, 1929년까지 도쿄 조선YMCA 총무로 활동했다. 19298월 미국으로 건너가 스프링필드대학에서 수학했다. 193010월 귀국하여 조선YMCA의 기관지인 [청년]의 주간을 맡아보다가 19311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조선YMCA 총무로 활동했다. 1934년 귀국하여 [동아일보] 잡지부장과 [신동아] 주간을 역임했다.

 

815해방 후 한국민주당에 참여했고, 미군정청 문교부 교화국장과 제주도지사를 역임했다. 그 뒤 연희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인하대학교 교수와 제주대학교 총장을 역임했으며, 이화학당, 성균관대학교, 중앙여자중고등학교, 근명상업중고등학교 등의 재단에 관여했다.

 

언론인교육가.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 출생. 장훈초등학교를 거쳐 1915년 보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1917년 동경관립 외국어학교 노어과(露語科)에 재학하던 중 유학생 최팔용(崔八鏞) 등과 독립운동을 추진하여 2·8독립선언을 발표하였다. 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동경 유학생 학우회의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위원과 [창조(創造)]의 동인으로 활동하였고, 1922년에는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의의 기관지 [현대(現代)]의 주간(主幹)을 지냈다.

 

1930년 미국 스프링필드대학을 마치고 돌아와 [신동아(新東亞)]의 잡지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을 계기로 퇴직하였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 교화국장을 지내고 1948년 연희대학 교수, 1951년 제주도지사, 1952년 제주대학 초대 학장, 1954년 이화여자대학교 부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대한소년단 부총재, 중앙여자고등학교의 이사와 감사를 지냈으며, 1966년 일본에서 한국기독교청년회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현재 독립기념관에 최승만의 비망록이 전하고 있다. 비망록에는 어렸을 때 정동예배당 유년 주일학교 생활과 함께 한일강제병합의 경과,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 실패, 중학교 때의 사상적 갈등에 대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그밖에 YMCA 영어과에 편입하여 졸업한 일, 시골 생활을 하면서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동경외국어학교에 다니면서 2·8독립선언에 참가했던 일 등을 상세하게 남기고 있다. 동경 YMCA에서의 활동과 사업, 관동대지진 및 좌익계 인물에 관한 글, 김지섭이봉창양근환의 의거 등과 만주 생활과 8·15해방 등을 상세히 담고 있다.

 

저서<극웅필경(極熊筆耕)>(1970) <바르고 옳게 살자>(1983)

유고<나의 회고록>(1985)

2020년 7월 27일 월요일

최석주 [崔錫柱, 1901-1989]

최석주 [崔錫柱, 1901-1989] - 일본 청산학원 졸업

 

# 장공칼럼 3.1 야화(夜話) : 3월은 “3.1”의 달

  • 민족이란 집단의식을 뿌리뽑기 위해서는 조선역사란 것을 지워버려야 했다. 최석주 목사가 일본 도꼬에서 학생교회 목사로 있을 때, “조선민족이란 단어와 조선역사의 어떤 설화를 주일학교에서 한 일이 있다는 혐의로 잡혀 서대문 감옥에 무작정 투옥됐다. 작정 없는 미결수로였다. 최석주 동경시절에 아오야마(靑山學院) 신학에 다니던 전성천이 최석주 교회에 출석했었다는 사실 때문에 잡혔다. “최석주가 조선역사 얘기하는 걸 들었다고만 하라는 것이었다. 증언을 날조하려는 것이다. 전성천은 아직도 학생기질이라 꿋꿋했다. “들은 일이 없소로 일관이다. 비행기 태우기, 물먹이기 짓밟기, 주리틀기 - 몇번 실신했는지 모른다. 깨나면 또 그렇게 써라, 지장찍어라한다. 종시 버렸지만 고문은 그의 기백을 멍들게 했을 것이다. 마감에는 서장이 불러들여 잘먹이고 편히 쉬게 하고 조용조용 같은 요구를 했단다. 전성천은 하라오 깃데모배를 가르는 한이 있더라도 안한 일을 했달 수는 없소했단다. 서장의 말 - “이놈은 중학교부터 일본에서 배워서 일본기질이 박혔으니 어쩔 수 없는 놈이다. 내보내라!”하더라는 것이다. “조센진”(조선사람 천대말)모가지 날아나도란 맹세는 하지만 배를 갈라도란 말은 안쓰는데 이놈은 일본인처럼 셋뿌꾸”(切腹)란 말을 뱉은걸 보아 그 일본기질을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다. 그 후에 최석주도 이어 나오게 됐다.

 

# 대한예수교장로회 수송교회 역사

  • 19437월 최석주 목사 취임
  • 19536월 수복 후 임시로 천막 교회당을 설립하고 최석주 목사 예배 인도
  • 19768월 최석주 목사 임시 시무

 

# 서강의법학교(西江懿法學校)

  • 최병헌(崔炳憲) 목사는 1904년에 감리교청년회인 의법회(懿法會,엡윗회)를 확장하며 정동 엡윗청년회 내에 의법학교"(懿法學校)"몽양원"(蒙養園)을 설립하였다. 특히 의법학교는 국정(國政)이 나날이 시들어감을 분히 여기며 탄식하여서 자존자립(自存自立)의 정신을 고취할 목적으로 설립하였다.(金鎭浩,”故 擢斯 崔炳憲先生 略歷“,神學世界 第122,p101-102.몽양원은 유치원과 같은 과정임)
    서강의법학교 설립연도에 있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감리교연감(1935)에는 1907년으로 나와 있고, 1935년 연합운동회 때 의법학교에 대하여 1909년 설립 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이는 정확한 것이 아니다.
    이미 1909년 의법학교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음으로 그 이전에 설립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점은 의법학교를 졸업한 장로교회 최석주 목사도 지적하고 있다.
    의법학교 초창기에 대하여 제4회 졸업생인 최석주 목사(장로교)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서강교회는 그 당시 모든 교회들이 그러했듯이 교육사업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였다. 서강에 의법학교는 바로 서강교회의 중대한 사업이었다. 이 학교는 나에게 유일한 모교라 할 것이다. 나의 시대, 나의 환경은 학교에 다니기를 허락지 아니하였다. 반쯤 하다 그만두게 되고 시작만하고 끝을 보지 못하곤 했었는데 이 의법학교만은 완전히 시작해서 졸업한 학교이다. 그때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돈푼이나 있는 이들이었고 풍조에 예민한 사람들은 공립보통학교에 가는 것이 능사였다. 그 나머지 중에서 더러는 예수학교라도 좋다고 생각하여 의법학교에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 학교는 적지 아니 허술하여서 뚝배기학교하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崔錫柱,“恩寵물같이”,서울,CLSK,1975.p43-46)
    최석주 목사는 당시 교사로 음악지도에 김동익(金東翼) 선생, 국어 한문에 박영진(朴英鎭) 선생, 일어에 박병제(朴秉濟) 선생이었고, 동창으로는 고성진(高星鎭), 박연우(朴淵瑀), 이택주(李澤周) 최등만이라 회상하고 있다.(최석주,恩寵물같이,p47)

 

# 반민특위기록 : 전필순 조사 중

  • : 혁신교단 간부는 누구누구인가.
  • : 사무관장 사무관장 김영섭[金永燮], 총무국장 이동욱, 전도국장 박연서[朴淵瑞], 교육국장 윤인구[尹仁駒], 재무국장 최석주[崔錫柱], 연성국장 김수철[金洙喆](미상) 외 각도 교구장 등이 하였으나 기억에 나지 않습니다.

 

# 대한예수교장로회 마포교회

  • 19643최석주 목사 부임(1971.1.9. 정년퇴임, 노회 공로목사 추대)
  • 196412최석주 제9대 목사 위임 시무

 

# <주일학교 찬송가, 1962>의 역사 오소운 목사

  • 새가정잡지는 본래기독교가정이란 이름으로 1952, 피난지 부산에서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발행하였는데, 1953부터새가정으로 제호를 바꾸었다. 발행인은 서회총무 김춘배(金春培) 목사요, 잡지 주간은 일본 청산학원(靑山學院) 신학부를 졸업한 최석주(崔錫柱, 1901~1989) 목사였다. 그리고 초대편집장은어린이 찬송가, 1953》「축하하세 동무들아를 작사한, 순보 이종환이었다. 2대 편집장은 이화여대 출신의 최덕보(?)였는데, 19551월 구세군 사령부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서회 편집부에 있던 내가 19552월에 제3대 편집장이 되었다. 그로부터 11년 후인 1966, 나는 최석주 목사가 담임한 대한예수교장로회 마포교회에서 장로 안수를 받았다.

 

# 연세대학교 대학교회 연혁

  • 연세대학교에서는 19624월 부활주일에 새롭게 연세대학교 대학교회 창립예배를 드렸고, 최석주(1962.5~1963.3), 김정준(1963.4~1966.7), 서남동(1966.8~1967.7), 이환신(1967.7~1974.12) 목사님에 이르기까지 10여 년간, 대강당 4층 언더우드 홀에서 예배를 드렸다.

 

# 대한예수교장로회 서울노회 연혁 중

  • 1935.12.27. : 경성노회 임시노회가 예수교서회 회의실에서 회집되다. 함태영, 전필순, 권영식, 최석주를 다음 정기노회 때까지 정직시킴
  • 1943.04.12. : 새문안예배당에서 경기노회가 재조직되다. 혁신교단에 참여했던 전필순, 최석주, 윤인구 목사 제명하다.

 

# 한국기독공보 - 창간 56주년 특집/ 한국교회와 함께해 온 한국 근대사의 '살아있는 역사'

  • 일제말기인 1945년 일본은 한국교회를 강제로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통폐합시켰으며 이에 따라 교회 언론도 강제 폐간돼 암흑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운 법.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민족은 해방의 기쁨을 누리게 됐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기성교인과 출옥성도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는 등 분열과 갈등, 혼란이 가중됐다. 그 와중에 한국교회는 918일 새문안교회에서 남한측 개신교회 전체의 모임인 조선기독교 남부대회로 모임을 가졌다.
    조선기독교회 기관지로 출발 본보는 이듬해 117, 남부대회인 조선기독교회의 기관지로서 '기독교공보'란 제호로 매주 목요일 4면으로 발행을 시작했다. 당시 이사회 조직은 이사장 김관식 목사(대회장) 이사 강태희, 최거덕, 김영섭, 김영주, 변홍규, 이수현, 이호빈, 심문태, 배은희, 정종원, 김창국, 김원봉, 신후승, 김춘배, 임병철, 강경옥, 엄재희 목사였고 실무진으론 편집부장 김춘배 목사, 편집부원 임영빈, 김재준, 최석주, 강태희, 송창근, 최거덕, 최윤관 목사가 수고했다.

 

#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회의록

  • 24회 총회 - 재경 기독교 유지회의 적극 신앙단에 가담한 박용희, 권영식, 전필순, 함태영, 최석주씨 등에게 총회는 탈퇴를 권면하였으나 이들은 총회 절연을 선언하다.
  • 25회 총회 - 경성노회 함태영, 박용희, 권영식, 전필순, 최석주목사 등을 노회에 불응하여 치리하였고, 전필순, 권영식목사는 예수교서회에서 경영하는 기독신보를 무법으로 탈취하여 갔다 하여 처벌하였음을 보고받다.

 

# 1공화국 초기 이승만정부 공보선전활동의 성격

  • 정부수립이후 한국전쟁기간 공보처 차장
  • 최석주(1953.4~1955.2) - 일본 청산학원 신학부 졸업, 목사, 어린이잡지 새벗사 편집주간, 사장.
  • 1953423일 제3대 공보처 차장으로 취임한 최석주는 195215일 피난수도 부산에서 대한기독교서회가 월간으로 창간한 어린이잡지 새벗의 편집주간을 거쳐(최덕교, 2004, 507), 사장으로 활동하던 목사였다(조선일보, 1953.4.26.). 이승만정부 고위직에 기독교 목사가 많았는데, 최석주도 그런 전형적인 인물이었다(강인철, 2009).

 

# 일제와 나 어느 평범한 목사의 수기(최석주) - 기독교사상 19748월호

 

# 최석주 선집

  • 1) 希望成長있는 對話
  • 2) 永遠한 그리움
  • 3) 적은 무리의 證言
  • 4) 내가 본 人生百景
  • 5) 恩寵물같이

 

# 배재학당남가주50년사

  • 최석주 목사(32회 졸업)

 


# 이용도 목사의 목회윤리 임걸(연세대 교목)

  • 이용도에 대한 일반적인 일반적인 비판과는 다르게 그는 분명히 유명화라는 여자를 신격화하거나 실제적으로 주님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분명히 이 사실을 이용도가 최석주(崔錫柱) 목사에게 물론 明花라는 그 개인이 도 아니요, 도 아니다. 그를 통하여 나타나는 말씀은 곧 주시다. 그러므로 그 말씀 앞에 경배치 아니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는데서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308)

 

# 조향록 목사 조선 기독교 혁신교단 파문

  • 나는 아직도 그 날 혁신 교단 간판이 붙어 있는 감신대 사무처 건물 안에 있던 통리 전필순 목사, 교육국장 윤인구 목사, 그리고 최석주 목사 등의 처참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을 주동했던 목사님들은 마치 가야바의 법정 문밖에 나와 주를 모른다 했던 자책에 못 견디어 가슴을 치고 통곡했던 베드로의 심정을 안고 외로운 발걸음으로 어두운 밤길을 헤매었을 것이다.

 

# 중앙일보 -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심기 40새 벗400호 맞는다(1992.04.21.)

  • 긴 역사 속에서새 벗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준 주요 인사들로는 김동리·황순원·정비석·김내성·김말봉·안수길·박경리·최인욱·유치환·박목월·박두진·이상로등 문단의 원로들과 최석주(전 공보부차관이영희(전 국회의원김회보(목사최진연(교사)등 언론·종교·교육·문화계의 원로 및 중진들.

 

# 한국교회 처음이야기 이덕주

  • 최석주 목사의 증언대로, 전덕기 목사의 생애는 예수의 교훈대로 걸인들, 가난한 자,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 천대받는 사람들을 위해 진심으로 도와주고 봉사한 생애였다.

 

# 한국교회 순교사 박연서(1893-1950)

  • 박연서목사는 1893년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효자리 청담에서 박성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고향마을 청담을 사랑해 일생을 청담이란 아호를 사용했다. 어려서는 8년 동안 한문을 읽었고 1908년 그의 나이 16세가 되던 해에 보성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103월 개성보창학교를 거쳐 19176월 피어선성경학교를 졸업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백모에게 기름을 받았던 그는 다정다감한 성격에 예수까지 믿게 되자 폭넓은 아량을 가진 젊은이로 성장했다. 피어선 성경학교에 재학시절부터 서석, 철원, 화천, 연천 등지에서 목회했던 그는 1919년에 일어났던 철원애국단의 연락책임자로 연루되어 원산형무소와 서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의 인간성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는 최석주의 "내가 본 인생백경 박연서" 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17회(1928) 총회장 : 염봉남 [합동]

 충청도 괴산 출신 염봉남 목사 (1875. 9. 27-1036. 11. 17) 는 충청북도 괴산읍에서 출생했다 . 1833 년 한문 사숙 ( 私塾 ) 에 입학하여 송철원 선생 문하에서 천자문으로부터 사서오경에 이르기까지 문리를 터득했다 . 1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