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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8일 금요일

제17회(1928) 총회장 : 염봉남 [합동]

 충청도 괴산 출신

염봉남 목사(1875. 9. 27-1036. 11. 17)는 충청북도 괴산읍에서 출생했다. 1833년 한문 사숙(私塾)에 입학하여 송철원 선생 문하에서 천자문으로부터 사서오경에 이르기까지 문리를 터득했다.

1804년 기능참봉(冀陵參奉)이란 말직(末職)을 받아 봉직한 적도 있는 그는 대구로 내려와 우연히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남성정예배당(현 대구제일교회)에서 결신해 19111013일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대구 선교지부에 나와있는 어도만(Rev. Walter C. Erdman )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연봉남이 대구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 길거리에서 미국인이 서투른 우리 말로 전도하는 것을 보고 하도 신기해서 가까이 다가갔는데 말로만 듣던 미국인을 직접 보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청중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미국놈 물러가라며 욕설을 퍼 붓는데도 화를 내지 않고 싱글벙글 얼굴에 웃음을 띄면서 간단한 열설을 하고 난 후에는 쪽복음을 나누어 주면서 천지의 대 주재되시는 조물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선교사가 바로 공식 선교사로 영남지역의 최초선교사로 부산에 파송 받은 후 대구를 거쳐 나중 평양선교부 교육담당 선교책임을 맡은 안의와(Rev. James E. Adams, 安義窩) 목사였다. 그는 배위량(William M. Baivd, 裵偉良) 선교사의 처남이다.

 

안의와 선교사로부터 쪽복음 받아

염봉남은 청중들의 비아냥거림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그의 모습에 감동되었다. 선교사로부터 쪽복음을(마태복음) 한권 얻어 가지고 와서 그 책을 1장부터 읽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태복음 제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보를 읽는 순간 이 종교는 양반들이 믿을 종교라고 생각이 들어 성경을 계속 읽어 나갔다.

그는 쪽복음으로 된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이 책은 양반 뿐만 아니라 천민들도 꼭 읽어야 할 귀중한 책임을 알고 선교사가 살고 있는 마을을 찾아 나섰다. 남문 안에 있는 남성정 선교사집을 찾아가서 대담하게 대문을 노크하였다. 누구요?라는 큰 소리가 대문 안에서 들렸다. “저는 선교사님을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온 염봉남이라는 사람이외다.”

아담스 선교사는 신기해 하며 문을 열어 주고 염봉남 청년을 반가히 맞아 드렸다. “선교사님 저에게 쪽복음을 팔게 해 주세요. 저도 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습니다.” 느닷없이 찾아와 성경 쪽복음을 팔게 해 달라고 하는 염봉남에게 아담스(Adams)는 쪽복음을 팔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이 일로 인연이 되어 염봉남은 안의와 선교사의 선교구역에서 일할 수 있는 조사(助師)로 임명을 받고 권서로 활동하였는데, 옆에서 주의깊게 지켜본 안의와는 염봉남의 열심에 놀라고 말았다.

 

쪽복음 파는 권서로 출발

한편 그는 매년 농한기를 이용해 개설되는 달()성경학교에 한번도 결석하지 않고 꼭 참석하여 3년간의 모든 과정을 다 이수하였다. 이에 감동한 안의와 선교사는 염봉남을 1912년 자신의 순회전도사로 임명하였다. 잠시동안 달성지방 내에 있는 3개처 교회를 순회하면서 전도사의 일을 하였다.

염봉남은 이와같이 안의와 선교사의 따뜻한 보살핌과 후원으로 19153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여 5년간의 신학수업을 마치자 자신이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신학교에 다녔던 경산읍교회에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았다.

그는 19209월 경북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고 19211월부터 192316일까지 경산읍교회 제1대 위임목사로 시무하다가 잠시 떠났다가, 19252월에 임시목사로 다시 부임 그 해 말에 사임하고 대구 신정교회(현 대구서문교회)로 전임하였다(경산교회 100년사, 김광남, 2010 대구 pp.196-202).

염봉남 목사는 경북노회 안에서 이름난 양반목사로 존경 받았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대구서문교회(구 신정교회) 당회에서 청빙서를 작성해 한 부는 염봉남 목사에게, 또 한 부는 경북노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염봉남 목사는 평양 장로회신학교 재학시절에 매월 생활비를 보태주고 학비를 보조해 준 경산읍교회를 떠날 수 없어서 처음엔 대구 신정교회의 청빙을 거절하였다(총회를 섬겨 온 일꾼들, 김수진, 2005. 장로교출판사 p.79).

그러나 재차 신정교회로부터 강력하게 청빙해 오므로 염봉남 목사는 대구 신정교회(新町敎會)를 방문하여 당회원들과 함께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장로님들의 뜻은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도 경북도청이 있는 대구로 목회지를 옮기고 싶지만 목사가 기본적인 윤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정중하게 진중한 속마음의 거절의사를 전달하였다.

이 말을 들은 신정교회 당회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설득해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당회원들 마음 속에 약속이나 한듯, 신정교회 당회원들이 똘똘뭉쳐 염봉남 목사를 적극적으로 모셔야겠다는 강한 의중을 갖고 염목사를 설득하였다.

! 목사님의 그 뜻은 잘 알겠습니다. 경산읍교회도 하나님이 세운 교회이고, 대구 신정교회도 하나님이 설립한 교회입니다. 목사님께서는 그렇게도 우리 신정교회 당회원들의 마음과 신정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몰라 주십니까?”

이렇게 얼마동안 서로간 대화를 하다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다시 한번 상면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대구 신정교회 당회원들이 경산읍교회 목사 사택을 자주 드나드는 것을 눈치챈 경산읍교회 당회원들이 염목사 모르게 모여 의논하게 되었다. 당회원들 가운데 어떤 장로는 우리 교회 염봉남 목사를 보다 큰 도시에 가서 목회할 수 있도록 하게 하자고 제안하여 누가 강권한 것도 아닌데 당회원들이 뜻을 모았다.

경산읍교회 당회원들이 당회장 염봉남 목사 사택을 방문해 대구 신정교회의 청빙을 수락하시어 더 큰 사역의 열매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란다고 아름답고 건설적인 권유를 하였다. 이렇게 상황이 바뀌게 되자 염봉남 목사의 대구 신정교회로 부임하는 문제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고 아무 어려운 문제없이 경북의 중심지 대도시인 대구 신정교회로 은혜 가운데 부임하게 되었다.

염봉남 목사가 부임한 1922년 신정교회 교인수는 400여명에 불과했으나 1933년 교인총수는 1988명으로 성장하였고 192856일 대지 569평 건평 294평의 새 예배당을 건축 헌당 하였으며, 염목사는 신앙인격과 리더십도 겸비하여 경북노회 노회장으로 두번이나(1920, 1921) 역임하였고, 192897일에 모인 (대구신정교회당)총회에서 교단의 수장격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7대 총회장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대구 신정교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

총회장으로 당선된 염봉남 목사는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신정교회 성도들과 경북노회 전교회가 환호하고 기뻐하였다. 그가 사회석에서 총회를 진행하면서 뜻있는 몇가지 사항을 결의하였다.

한국에서 중국으로 파송된 선교사들에게 만 7년이 되면 1년씩 안식년을 주기로 하다. 총회산학 각 노회는 농촌부를 설치하고 동시에 총회는 농보(農報) “농민생활지를 간행하기로 하다. 조선주일신보 아이생활지를 출판하도록 하다. 장로교 감리교가 협동하여 12월에 신정찬송가를 간행하기로 결의하였다.

염봉남 목사는 대구 신정교회를 부흥시킨 목사이고 신정교회 정통성을 이어받은 제2교회 90년 역사에서 노회와 총회에서 많은 공헌을 한 위대한 목사로 역사에 길이 남긴 교회의 지도자로 승리한 주의 종으로 길이 기억해야 할 영남지역의 초기 지도자였다고 하겠다.

1936117일 염목사는 조용히 주님의 부름을 받고 영민하였다(미간행, 대구서문교회 100년사, 이혜정 박사 저 2015, p.159).

 

[출처 : 교회연합신문]

제71회(1986) 총회장 : 안중섭 [합동]

국기에 대한 배례경례로 바꾼 역사적 주역

 

황해도 황주 출신, 단신 월남

안중섭목사(1918-2004)191879일 황해도 황주군 청수면 원정리(중동) 210번지에서 아버지 안용수(安容洙)와 어머니 김사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동생 승섭(承燮, 1920. 8. 15), 팔섭(八燮, 1026. 3. 16), 봉섭(鳳燮, 1929. 1. 5)이와 여동생 화섭(花燮, 1923. 3. 15)이 있었으나, 단신으로 월남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생사는 알길이 없다.

가족 중에는 아무도 교회에 나가는 형제들이 없었고 혼자 유년주일학교에 나가기 시작하였고, 젊었을 때에는 중화장터의 씨름판에 나가 황소 한마리를 상으로 타 집으로 몰고 왔을 정도로 우직한 성품이었고 건장한 청년이었다. 이같은 성품이 그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나타나 성경말씀과 배치되는 일은 절대로 타협 못하는 올곧은 성격을 평생 유지하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안목사는 처음 예수 믿었던 시절에 겪은 사건에 대하여 안재정목사가 출판한 <원로 목사행전>(목양사 1977. p.127-129)에 보면, 어느 해인가 한번은 조상기일이 하필이면 주일이었다. 보통때는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올 수 있었는데, 이 날만은 빠질 수가 없었다. 백부(伯父) 댁 식구들과 안목사 가족들 그리고 숙부(叔父)님 댁 식구들까지 대소가 가족들이 모여 차례대로 조상의 신위 앞에 절을 하고 제사가 끝나면 한 자리에 둘러앉아 제사지낸 음식을 나누어 먹어야 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조상에 대한 제사는 자식들의 도리이니 우상숭배가 아니겠지 하는 생각과, 다른 한편에서는 아니야 하나님 외에는 어떤 형상이든지 절하고 섬기면 우상이야 하는 생각으로 속으로 갈등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집안 어른들과 상의할 만한 처지도 아니었다.

그 순간 어른들의 눈을 피해 몰래 빠져나가 예배당으로 달려가 엎드려 기도했다. 몇 시간이 지나 집에 왔을 때는 제사가 이미 다 끝나고 제사음식을 나누어 먹고 있는 중이었다. 어른들의 눈길이 심상치 않았다. 이미 일은 벌어졌음으로 쫓겨나던 말던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나는 제사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라고 소리치고는 냅다 대문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따라 나오신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할머니께서 모든 것을 용서하셨다고 했다. 안목사는 이 날이 내가 예수 믿고 처음으로 기쁨과 만족을 누린 날이고 하나님께 감사한 날이었다고 고백하였다.

 

서당에서 한문공부해 한시 즐겨

안중섭목사는 일찌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천자문과 동몽선습(童蒙先習)과 명심보감(明心寶監)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마치고 시경(詩經)을 배우다가 신학문이 들어와 학교에 다녔다. 그래서 그는 생시에도 한시(漢詩)를 좋아하고 즐겨 외웠으며 설교에 응용하기도 했다.

당시 학교생활이란 것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당시 시국상황이 일본이 대륙진출을 위한 야심으로 철도부설과 도로공사 비행장 신설에 혈안이었고 심지어는 군수품 공장과 염전에까지 학생들을 동원 1년 중 절반은 보국대란 명분으로 노동판에 끌고 나갔으니 학교생활이 재미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만이 쌓여갔다. 안목사는 이러한 한심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고 살맛나지 않는 세상 가운데서도 버티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영접한 예수님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인류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는데 나도 우리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무엇인가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당시 일제의 탄압으로 시대가 점점 더 어려워져 가는 판국에 예수를 믿으며 교회에 나가는 것조차 어려운 일인데 기독교 지도자의 길, 목사가 된다는 결심은 생업을 포기하고 가족을 버려야 하는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다.

거느리고 있는 부모님과 동생들 그리고 아내(이섬녀, 1920. 3. 19)와 첫아이 은신(恩信, 1942. 1. 5)이까지 있는 한 집안의 장남으로써 가사(家事)를 포기한다는 것은 보통 결심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길 상황이 아니었다. 더우기 일제 말엽이라 평양신학교가 이미 휴교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던 안목사에게 드디어 상상하지도 못했던 815일 민족해방의 날이 다가 온 것이었다.

 

한때 경찰에 지원 순경생활도

안목사(당시 집사)는 우선 사회질서 확립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어 잠시동안 경찰에 뛰어들어 순경이 되었다. 고향 중화지서에서 근무할 때 동리에서 해방을 맞이해 기념하는 동네 굿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강변 모래밭에 멍석을 깔고 천막을 치고 유명한 무당 다섯을 데려다가 큰 굿판을 벌여서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 놀아보자는 것이었다.

이 일을 위해 동리에 있는 각 기관과 유지들이 기부금을 낸다고 야단이었다. 일제 때 천황을 섬긴 것도 억울한데 이제 막 해방이 되어 자유를 찾았는데도 무지몽매한 백성들이 무당을 데려다가 굿판을 벌리며 미신에 빠진다는 것을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각 기관에서까지 이를 권장하며 기부금을 내고 백성들에게 우민정책을 쓴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안중섭 순경은 지서장에게 이번 동네 굿은 못한다고 선언을 했다. 그러나 지서장은 백성들이 해방을 기념해서 기쁘게 놀아보자는 것인데 반대하지 말라고 하면서 나가버렸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마당에는 온갖 음식들이 차려지고 제사상에는 돼지머리가 올라와 웃고 있었다. 무당들은 돼지머리에 돈을 꽂은 사람들을 위해 한바탕 춤을 추며 돌아가고 있었다. 안순경은 총을 들고 굿판에 나가서 굿을 못한다고 큰 소리쳤으나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안순경은 총을 공중을 향해 한발 쏘았으나 여전했다. 안되겠다 싶어 총구를 무당을 향해 걷어 치우지 않으면 쏘겠다고 했더니 무당과 모인 무리들이 혼비백산해 도망쳐 굿판은 막을 내렸다.

사실 8·15의 감격은 잠시였고 2~3개월이 지나자 북쪽엔 붉은 군대 소련군이 신의주와 만포로부터 진주하게 되더니 갑자기 공산주의(共産主義) 바람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경찰서가 내무서(內務暑)로 바뀌게 되자 안순경은 사직하였다.

그때 마침 개교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북한에서 전개된 공산주의 이념의 확산으로 제대로 신학교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곳에서의 신앙을 유지하기란 생사를 좌우하는 지경에 이르자 안중섭은 1년의 신학을 마치는 둥 마는 둥 이젠 몸을 피하지 않으면 안될 위기에 이르자 38선을 넘어 월남하게 되었다. 북쪽에 가족을 두고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에 온 안집사의 삶도 평탄할 수 없었다.

 

6·25전쟁으로 남쪽에서 목회

곧 터진 6·25전쟁으로 안목사는(당시 전도사) 경상북도 청도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그 곳에서 청도신읍교회를 거쳐 동곡교회 전도사로 후엔 압량제일교회(현 은혜로교회)에서 안정된 목회를 하다가 경청노회가 설립될 때 창립노회장(1962)을 역임한 후 수원제일교회의 부름을 받고 경기도로 목양지를 옮겼다.

수원제일교회에서(1966부임) 교회 앞에 선언한 안목사의 목회철학은 주일성수 온전한 101배가 전도 교회개척 의로운 교육이었다. 안목사의 5대 목회철학은 바로 자기의 일생 실천하고 겪었던 신앙철학이기도 하고 목양의 지표이기도 했다(수원제일교회 50년사 2004. p.237~305).

안중섭목사의 목회관을 이야기하면서 특기해 둘 역사적 사건이 하나 있다. 6·25동란 직전, 신학교 재학 중 강원도 횡성군 소재 공근교회 전도사로 사역할때 겪은 고난의 승리 사건이다.

오늘날처럼 국가 행사 때 국기에 대한 경례를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대는 식이 아니고 국기에 대한 배례라고 하면 선 자세에서 90도로 허리를 굽혀 절하던 시기에 자기교회 국민학교에 다니는 김안위라는 학생이 아침조회 때 안전도사에게 배운대로 절하지 않고 그냥 서 있다가 교장 선생님이 그 학생을 그냥 집으로 돌려 보낸 사건이 터졌다.

왜 국기에 대한 배례를 하지 않았느냐고 추달했을 때, 그 학생이 우리교회 전도사님이 국기에 대해 절하는 것은 우상숭배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고 해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안했다고 했다.

이 일로 안전도사는 1950120일 강원도 횡성경찰서에 연행 구금되는 사건으로 비화된 것이었다. 춘천 구치소로 이감되어 있을 때 어떤 군목이 면회를 와서 당신을 위해 전국교회가 기도하고 있습니다라며,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를 했다. 이 일로 인해 최동진목사 이영수전도사 등의 연명으로 경무대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진정하게 되었고 이승만박사의 지시로 국기에 대한 배례가 오늘의 국기에 대한 경례로 바뀌는 역사적인 주인공이 되었다. 이는 안중섭목사의 투철한 성경적인 신앙의 결실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일을 어여삐 보셨던지 하나님께서 19869월 제71회 합동측 교단 총회장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가 총회장으로 재임시 이룩된 몇가지 사역을 열거해 보면 총회 부채를 청산하였으며, 교단적으로 어려웠던 이영수목사를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하였으며, 손영준교수가 개인적으로 이끌어 오던 선교훈련원(M.T.I)을 오늘의 세계선교훈련원으로 정착시킨 것 등을 들 수 있다.

은퇴 후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수원제일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노회와 총회 일을 염려하며 가족들과 함께 지나다가 200310월 예상치 못한 뇌졸중으로 병상생활을 100여일 신고하다가 2004113일 오전 1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영면했다.

 

[출처 : 교회연합신문]

제39회(1954) 총회장 : 이원영 [합동]

경북 안동 이퇴계의 후손

이원영목사(1886. 7. 3~1958. 6. 21)는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천동에서 조선의 거유(巨儒) 이퇴계(李退溪)선생의 14대손, 이관호(李觀鎬)씨를 아버지로, 김영(金永)씨를 어머니로 188673일 차남으로 태어났다. 당시의 조혼풍습에 따라 15살에 이종헌(李鍾軒)의 차녀와 결혼하였다. 불행하게도 결혼한지 3년만에 18살의 청년으로 부인을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곧 고성인(固城人) 이승건(李乘建)씨의 차녀와 다시 혼인을 하였으나 다시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청년 이원영은 부모님의 강권으로 다시 경주인 이한제(李翰濟)씨의 장녀 김기출(金其出)여사와 결혼하여 슬하에 16녀를 두었다.

이원영은 1911324일 사립 보문의숙(寶文義塾)을 통해 한학을 연수하고 졸업하였다. 그는 보문의숙에 들어가기전 18913(5)부터 가정에서 한학을 수학하여 그의 총명함이 들어났다고 한다. 190845일에는 봉성 측량강습소(鳳城測量講習所)를 이수하고 졸업하였다.

1905년 한일합방으로 일제의 식민지화 된 조선의 뜻있는 민족주의자들과 애국자들이 숨도 쉬지 못하고 학정에 시달리던 조선민족은 드디어 191931일을 기해 기미년(己未年)에 전국적인 독립만세 사건이 우후죽순처럼 봉기하던 때에 이곳 안동군 도산면(陶山面)의 다수 종족(宗族) 중에서도 단신 솔선하여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위국충의(爲國忠義)의 불굴의 정신으로 시위를 하다가 경성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하였으며, 감옥에서 복역(服役)하던 중 동료들로부터 기독교의 복음을 전해듣고 구원의 진리를 터득하고 기독교를 신봉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3·1 독립만세로 첫 투옥

출옥 후부터 열심으로 성경을 연구하며 20리나 되는 원거리에 있는 예안교회(禮安敎會), 매주일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유교사상으로 짙게 물들어 있는 종중(宗中)어른들의 비난과 가족들의 반대로 한때는 역경과 핍박 속에 빠지기도 하였다.

심지어 가까운 친족들과 가족들이 합세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퇴계 선조의 후예로써 서양종교인 예수교를 믿는다는 것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수치요 우리 조상들에게는 용납못할 죄악이니 문중(門中) 밖으로 축출하고 족보(族譜)에서 제명한다는 위협을 당하였으나 이원영의 결심은 이미 죽음이라도 각오한 듯 불변의 신념으로 믿음의 절개를 지키겠다는 결단으로 지금의 도산서원(陶山書院) 맞은편 담촌(錟村)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드디어 192118일 예안교회당에서 권찬영(Rev. Crothers 權燦永)선교사로부터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입문이 되는 세례(洗禮 Baptism)를 받았고, 이듬해 1922225일에는 안동성경학원(安東聖經學院)에 입학하여 봄과 가을로 이어지는 성경공부를 계속해 우수한 성적으로 19251223일 졸업하였다. 이어 1930312일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 경안노회(慶安老會)에서 강도사 인허를 받았고 같은해 6월부터 강도사로써 영주중앙교회와 용상교회에서 시무하다가 1218일 경안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았다.

이듬해 19311228일 안동 인노절기념성경학원에 교수로 취임하여 열성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이듬해 19321220일 안동읍에 위치한 안기교회(安奇敎會, 안동서부교회 전신)와 신세교회(新世敎會 현 동부교회 전신)의 시무목사로 부임하였다.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

19341219일 제24회 경안노회 노회장으로 피선되어, 젊은 이원영목사는 선비의 후손으로 본격적인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교정의 한 가운데 서게되었다. 1939531일 드디어 전국을 휩쓸던 일제 당국의 신사참배 문제가 안동지방에도 불어닥치게 되어 이원영목사는 몸으로 저항하다가 안동경찰서에 구금되기에 이르렀고, 혹독한 고문과 극악무도한 체형(體刑)에도 의연한 태도와 어조, 그리고 부동의 신앙으로 무정한 법관도 신앙의 숭고성에 머리를 숙였고 미약한 성도들에게 격려의 경종(警鐘)이 되어 당시 조선 교계에 신앙의 정맥을 보존케 하였다. 그러나 연약한 육체는 악형(惡刑)을 감당하지 못해 마침내 폐렴과 건성근막염으로 몸이 쇠약해져 사람을 식별키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보는 이들이 모두가 눈물을 금치 못하였다.

그렇게 야만적이던 일본경찰당국도 할 수 없이 보석(保釋)케 되어 본가에 돌아오게 되자 병세도 많이 회복되기에 이르렀고 지금까지 6명의 딸만 있던 집안에 유일한 후사가 될 아들 요한을 얻게 되어 하나님의 축복하심과 천하의 공의가 살아 있음을 보게 하였다.

19417월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안동경찰서에 다시 구금되어 가족들도 모르게 포항 영덕 경산 등의 경찰서로 전감(轉監)되면서 무쌍(無雙)한 고문을 또 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님을 향한 돈독함은 변함이 없었고 국가와 민족의 흥망을 좌지우지 하시는 역사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조국의 광복을 위해 기도할 뿐이었다.

드디어 1945815일 광복의 희소식을 듣게 되었다. 일제하 36년의 지옥같은 생활에 벗아난 해방과 함께 드디어 16일 출옥하게 되자 당일부터 여러 교회의 부흥회를 인도하며 침체된 교회와 오염된 신앙의 정화운동을 전개하게 되자 죽었던 것 같았던 교회들이 생기를 얻게되고 우후죽순격으로 부흥되어 신앙생활에 새바람을 불어 넣어 교계에 생기를 불어 일으키게 되었다.

 

경안고등성경학원 창설

해방된 이듬해 19469월에는(5) 경안노회의 이름을 따라 경안고등성경학원을 창설하여 초대원장에 취임해 학생을 모집하였으나 처음 입학생이 18명이었다. 이들을 학생으로 받아 제1회 개학식을 안동교회에서 거행하고 성경학습은 교회 하층에서 시작하였다. 19명이 기초가 되어 매월 한 두명씩 불어 나더니 나중엔 30여명이나 되었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으니 기적이 따로 없었다. 이목사의 강의는 하루도 빠짐이 없었고 한시간도 결강이 없었다. 하교시간이 되어도 이목사는 귀가할 줄 모르고 늦게까지 학교를 지키며 성경연구에 몰두하였다.

그의 이런 완벽한 준비와 기도로 진행되다보니 모든 학생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으며 안동지방의 기독교지도자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20세기의 미국에 침체된 교계에 디·엘 무디(D.L. Moody)목사가 세운 시카고의 무디성경학교 출신들이 쇠퇴해 가던 미국교회에 새바람을 이르키며 세계선교에 이바지 했던 역사가 경산도 안동에 있는 경안고등성경학원에 같은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된 교계지도자를 키웠다. 그 결과 1975년 현재 교계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는 목사의 수가 46명 지도사 100명이 넘고 있다.

그는 1950116·25전쟁의 와중에서도 세번째 경안노회장에 피선되어 195311월까지 4, 5차 노회장으로 노회와 안동지역 복음화를 위해 앞장섰다. 그리고 전쟁이 겨우 휴전으로 진정된 직후 혼란기를 맞이했던 1954423일에 한국장로교회의 최고의 명예로운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9대 총회장으로 우뚝서게 되었다.

 

총회장시절 신사참배 결의 취소 성명서 채택

그가 총회장으로 수고하던 그해에 결의된 안건들을 보면 27회 총회에서 결의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는 성명서를 채택하였다. 신사불참배 교역자와 신자, 또 선교사를 제명한 노회학교 각기관에 명하여 그 기록을 취소키로 가결하였으며 38회 총회 결의에 따라 신학교를 한인교장 박형룡박사, 이사장에 안두화 선교사를 선임하여 대구서문교회에서 정식 취임케 하였고 경기노회를 경기 강원노회로 분립을 결의하였다.

그는 올곧은 정의로움과 관용의 선비 정신으로 어떠한 불의와 역경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종된 사명을 다한 진실한 지도자였다. 서울영락교회 한경직목사는 이원영목사를 추모하는 글에서 훌륭한 가문, 고귀한 명성, 영광스런 성직, 실로 값진 것은 한몸에 지닌 자랑스럽던 한 인물의 생애, 그는 일제의 폭정아래 수없이 투옥을 당하시며 오로지 나라를 사랑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걸어가셨다. 그 독실한 믿음, 고결한 인격, 온유 겸손한 성품, 충성된 하나님의 종, 늘 우러러 존경합니다라고 썼다.

또 예장합동 총회장을 역임한 창신교회 원로 신세원목사는 이원영목사를 이목사님은 참신자, 참 애국자, 참목회자라고 평가하였다. 한 지방에서 평생 친구로 동역자로 안동교회 원로요 증경총회장이었던 김광현목사는 첫째, 애국자이셨다. 둘째,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광복 후엔 경안성경학교를 설립 인재양성에 힘쓴 인물로 서부교회를 개척성장시켰으며 총회장이 되어 교단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하였다(영원한 스승 이원영목사 김성년 외 공편 기독교문사 2001 p.15, 45).

이원영목사는 무엇보다 한지역에서 평생 헌신한 지도자였고 교회를 세우며 교육기관을 설립 운영하며 인재양성으로 교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일제 당시 당국으로부터 당한 체벌의 영향으로, 또 광복 후엔 교회재건과 뒷수습에 전력을 쏟아부어 헌신하였으나 이로인한 과로와 노쇠로 육체의 질환의 재발로 3년간 누워 지내며 영영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58621일 그가 그렇게 사모하며 바라던 주님의 영원한 품에 고요히 안기었다.

제17회(1928) 총회장 : 염봉남 [합동]

 충청도 괴산 출신 염봉남 목사 (1875. 9. 27-1036. 11. 17) 는 충청북도 괴산읍에서 출생했다 . 1833 년 한문 사숙 ( 私塾 ) 에 입학하여 송철원 선생 문하에서 천자문으로부터 사서오경에 이르기까지 문리를 터득했다 . 1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