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제 [趙昇濟, 1898~1971]
조승제(趙昇濟, 일본식 이름: 趙村昇濟, 1898년 ~ 1971년)는 한국의 장로교 목사이다. 호는 춘우(春雨).
경상남도 사천에서 출생하여 어릴 때(8살 때) 개신교에 입문했다. 마산 창신학교, 일본 아오야마학원 신학부를 졸업하고 장로교 목사가 된 뒤, 경남 김해를 비롯해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41년간 목회 활동을 했다.
양동교회 박연세 목사가 일제에 투옥되자 그 뒤를 이어 담임하였는데, 그는 일제에 부역했다. 박연세 목사는 목포 양동교회 10번째 담임목사로 1926-1942년에 사역했으며, 전남노회장으로서 전남노회에서, 그리고 1938년 제 27회 장로교 총회에서도 총대로서 신사참배 결의에 가담했으나, 이 배교 행위에 대한 가책을 느끼고 이후 정신을 차리고 바른 신앙과 민족 정신을 회복하려 노력했던 인물이다.
이런 박연세 목사의 체포 이후 조 목사는 194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31회 총회 때 필승기념선언문을 낭독하고, 이듬해에는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이라는 일제가 만든 어용교단 창설에 협력하여 목포지역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1944년에는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의장과 전남 교구장으로 일했다. 잘못된 어용 지도자 행세하며 그는 온금동교회, 죽동교회, 연동교회, 서부교회 등을 매각 처분하는 어리석음까지 자행하며 목포의 지역교회들을 와해 시켜 버렸다.
해방이후 친일부역행위로 위축된 조 목사를 김사라 집사가 목포 남부교회를 설립하며 청빙, 목회자로 재기하였고, 목포고등성경학교장을 지냈으며, 1958년 무안읍교회로 전임 사역하던 중 1961년 기장 총회장과 이후 한국신학대학 이사장을 지내다 1970년 72세로 사망하였다.
김 구 선생께서는 1946년 한정부 수립을 위한 목포시민 강연회를 개최 하고자 목포를 방문하여 시내 대의동에 위치한 (구) 유달호텔에 투숙하고 계셨다. 이 소식을 들은 목포남부교회 조승제 목사께서 김 구 선생을 방문하여 축복기도를 하였다. 조승제 목사의 축복기도에 감동한 김 구 선생은 조승제 목사에게 휘호를 써서 증정했다.
휘호 내용은 “尊 敬 上 帝” (존경상제) 네 글자였다. 즉 하나님을 공경하며 사랑 한다는 뜻을 담았다. 휘호를 받은 조승제 목사는 교회로 돌아와서 휘호를 표구하여 교회 사무실에 걸었다.
1939~4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회의록서기를 지냈고, 이후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총회 의장과 전남교구장을 겸임했다. 서기장이던 1941년 11월 장로회 창립 30회 기념사에선 “일본적인 기독교 건설에 매진하는 체제를 갖춰 바야흐로 국민적 자각을 촉진하여 신도실천(臣道實踐)의 정신, 종교보국의 이념을 철저화하자”고 주장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일제는 장로교단을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편입시켰고, 1945년 광복 직전에는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합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통합은 강제적인 것으로서 반발이 심했으나 강행되었으며, 조승제는 장로교단 전남교구장으로 참가했다.
이들 단체의 주요 활동도 찬송가 책에 일본 국가를 싣거나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고 징병제 실시 감사예배를 실시하는 등으로 전쟁에 협력한 것이었다.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성립 때는 부의장에 취임해 장로교단에서는 통리인 김관식 다음 가는 직책을 맡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는 목포에서 교육인으로 활동하였으며, 한신대학교의 전신인 한국신학대학 이사장도 역임했다. 장로교가 예장과 기장으로 분열되었을 때는 기장 측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 호헌대장 및 총회장을 맡았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종교 부문에 선정되었다. 손자이며 향린교회 목사인 조헌정목사가 2003년 할아버지 조승제 목사의 신사참배 강요 호응 등 친일 행적을 인정하고 공개 참회했는데, 이는 한국교회에서 매우 드문 일이라 화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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