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8일 금요일

제43회(1958) 총회장 : 노진현 [합동]

부산지역을 지킨 뛰어난 목회자로서 교정가


부산 구포에서 출생

노진현목사(1908. 8. 28~1998. 10. 15)는 부산 구포에서 아버지 노원필과 어머니 장소개씨 사이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구포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동명학교(동래고보 전신)에 진학하였으나 당시 이 학교는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면학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상경(上京)하였다.

그가 소학교를 마치고 동래고보를 다닐 때 친구를 따라 구포교회에 나가게 된 것이 교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서울에서의 노진현은 몇군대 학교를 알아보다가 중동학교(中東學校)에 입학 허락을 받게 되어 중단되었던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때 마침 보성학교(普成學校)에 다니는 고향 친구를 만나 종로 YMCA 뒤에 있는 중앙감리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그 교회에서 고향 구포(口浦)소학교 여교사로 있었던 분을 만나게 되어 계속 그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방학이 되어 귀향하면 옛날 다니던 구포교회에 출석하곤 하였다. 노진현은 구포교회에서 학습을 받았다.

그를 집례한 목사는 호주장로회 소속 예원배(Rev.A.C. Wright 芮元培)선교사였다. 예원배 선교사는 1912년 내한해 1942년까지 30년간 주로 마산과 진주 그리고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일제 간섭과 핍박이 극에 달하자 다른 선교사들은 고국으로 혹은 추방당하였음에도 예목사 부부는 다른 3명의 선교사와 함께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다가 강제연금 끝에 출국당한 선교사였다.

 

주기철목사로부터 세례받음

세례(洗禮)는 구포교회에서 주기철목사로부터 받았다. 주목사는 1926년 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부산초량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여 처녀목회를 시작했는데 당년 30세의 청년목사였다. 주목사는 노진현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구포교회의 당회장을 맡았음으로 종종 사무행정을 집행 하거나 성례식 거행을 목적으로 구포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게 되어 그의 설교를 가끔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노진현 목사는 생시에 자기가 순교자 주기철목사로부터 세례 받은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지인들에게 이야기 하곤하였다.

노진현이 세례를 받은 시기는 주기철목사가 초량교회에 부임한 후 구포교회 당회장을 맡은 19271월부터 노진현이 진주 광림학교 교사로 부임하기 전까지로 보는데 이 당시에 있었던 비화가 하나 있다. 잘 몰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워낙 사람이 없어서인지는 모르나, 노진현은 학습교인으로 교회의 집사가 되었다고 한다. 주목사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았으나 세례를 베푼 후 집사직을 계속토록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노진현은 장질부사에 걸렸다. 당시 장질부사는 염병이라고 해서 친척들도 외면하는 고질병이었다. 정진희 영수가 은행업무를 마치고 귀가 길에 자주 들려 간절히 기도해 주어 죽을 줄 알았던 노진현 청년에게 큰 감동이 되었다. 병세가 호전되어 몸을 추수릴만큼 회복되었을 때 진주에 있는 광림학교(廣林學校)로부터 교사로 부임해 달라는 초청장이 왔다. 이 학교는 호주장로회 선교부에서 1906년에 세워 운영해 오고 있는 소학교로써 학생이 100여명, 교사가 7~8명 가량 되었다. 이 일을 정진회 영수를 찾아가 의논했더니 그에게 목사될 꿈이 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음으로 그곳은 미션스쿨이니 신학교에 갈 수 있는 길도 열릴 수 있을지 모르니 진주로 갈 것을 권했다. 그래서 노진현은 광림소학교에 부임하였다. 부임하고 보니 그 학교 교장이 자신에게 학습을 준 예원배 선교사였고 노집사는 광림학교에서 동료교원 중 훗날 출옥성도로 고신 교단을 세운 한상동(韓尙東)을 만났다.

당시 한상동은 노진현보다 3세 연상이었고 기혼자였다. 그후 노진현과 한상동은 일본 고배(神戶)와 한국 평양에서 각각 신학공부를 하였고, 부산이 고향인 이들은 광복 후에도 부산에서 목회를 하며 때로는 동료로, 때론 서로 이견(異見)을 보이면서도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역사를 엮어 갔다(이상규, 한상동과 그의 시대 p.20~21 참조).

 

광림학교시절 황봉예와 결혼

노진현은 광림학교에 재직하는 192810월에 역시 미션스쿨인 진주 시온여학교 교사로 와 있는 황봉애를 만나 결혼하였다. 황봉애 사모는 부산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에 가서 고배여자신학교를 졸업한 인텔리였다.

그 즈음 광림학교는 신사참배를 완강히 거부하여 폐교의 위기에 처해 있어 노진현은 예원배 교장에게 일본에 가서 신학을 공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의 소개로 일본 고베에 있는 중앙신학교(中央神學校)의 입학 허락을 받아 도일하게 되었고, 재직했던 광림학교는 1929년 폐교의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고베에 있는 중앙신학교는 보수적인 칼빈주의 신학사상에 기초한 5년제 학교로 1년에 10명 이상을 받지 아니한 고로 전교생 수가 50명을 초과하지 않았다.

전원이 기숙사생활을 하되 크게 규제 하지는 않았다. 이 학교출신으로 일본과 한국에서 유력하게 일한 지도자들이 많다. 국제적 지명도가 있는 가가와 도요히꼬가 있고, 한국인으로써는 김우현 전필순 김치선 유호준 김만제 김광현 한명동인데 거의 장기목회자로 혹은 각자 속한 교단의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노진현은 특히 풀턴 교장의 조직신학과 그의 신앙인격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4학년일 때 학생들이 매년 2회씩 실시하는 정기 건강검진에서 폐가 좋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교수회에서 집에 돌아가 1년 쉬었다가 오도록 결정했으나 교장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려 계속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단히 어려울 때 카나다 선교사 영재형(Rev. L.L.Young) 목사가 그를 찾아와 도움을 주었다. 영재형목사는 노진현을 독일인이 운영하고 있는 병원에 맡겨두어 치료받게 한 후 치료가 끝난 다음부터는 선교사 서기일을 보게 하여 졸업할 시에는 비교적 생활이 안정되었다고 회고했다.

 

일본 고배 중앙신학교에 유학

영목사는 원래 함경도 지역에서 선교했으나 카나다 장로교회가 타교파와 연합하게 됨으로 합류를 거부하고 일본으로 건너와 선교하고 있었는데 대한신학교 설립자 김치선목사의 양 아버지로도 알려진 분이다.

노현진목사의 목회사역에 대해 고찰해 보므로 그의 지도자상을 살펴보자.

노진현목사는 일본에서 10년동안 3개 교회를 담임한 적이 있고, 조국 대한민국에서 1975년 은퇴하기까지 30년간 승리로운 목회사역과 교정(敎政)의 일생을 감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첫 사역으로 신학교 재학 중 와까야마 교회를 맡아 전도사로 봉사하였고, 후에는 교토(京都) 한국인 교회로 임지를 옮겼는데 이는 고베 중앙신학교를 졸업한 대구출신 최경학목사의 임지와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노진현목사는 교토로 목회지를 옮긴지 6개월이 지난 19356월에 목사 임직을 받았다. 목사 안수는 잠시 귀국했을 때 경남노회에서 주기철목사의 안수로 목사장립을 받게 되어 더욱 감격적이었다.

일본에서의 목회가 평탄치는 못했다. 일본 현지임에도 조선인과 조선인 교회에 대한 탄압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교회를 건축하면서도 헌당식이나 입당허락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고 노목사는 말했다.

그후 노목사는 오사까(大阪) 니시나리 한인 신앙공동체인 대판서성교회(大阪西成敎會)에 부임하며 귀국하기까지 7년간 사역하였다. 이곳에 있을 때는 일본말로 사회하고 일본말로 설교하라는 압력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수상한 사람이 들어오면 일본말로 하고 없으면 조선말로 설교했다.

 

부산 YMCA 재건사업

19456월 태평양전쟁에서 미군기의 공습이 강화되고 일본이 패색이 짙어갈 무렵 노진현목사는 일본생활을 정리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귀국 3개월만에 8·15 광복을 부산에서 맞이하였다. 초량교회 양성봉장로의 요청으로 청년의식의 중요성을 인식 YMCA 재건사업에 양장로는 회장으로 노목사가 총무로 Y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1945122일 첫주일에 노목사는 부산중앙교회를 설립했다. 감리교회였던 대청동의 교회를 그 교회목사로부터 안수받아 교회를 시작했다. 노목사는 이 중앙교회에서 평생목회의 과정을 영광스럽게 마치게 되었다.

이 날은 서울에서 한경직목사가 베다니교회를 영락교회로, 송창근목사가 바울교회를 성암교회로, 김재준목사가 야고보교회를 경동교회로 바꾼 역사적인 인연이 있는 날이기도 하다(장차남 회고록, 소명과 순명 2015. p.788~798참조).

그의 목회를 요약하면 신학적 바탕 위에 설교하라. 모든 목사는 다 부목사(주님의)이다 예절과 유머를 겸비하라. 기도와 심방을 게을리 하지 말라 일치와 화합하는 일에 투신하라.

노진현목사가 총회장에 피선된 것은 19599월 제44회 대전총회의 분리사건을 예견이나 한듯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던 1958925일 서울 영락교회에서였다.

총회장 당시 결의된 중요 안건들을 보면 지금까지 기독교교육협회에서 발행된 주일공과를 총회이름으로 개편, 아동들의 연령계층에 맞게끔 계단식공과 발행을 정책적으로 결의한 것, 계류중이었던 경기노회를 경기노회와 한남노회로 분립하기로 결의, 월남에 선교사 파견하는 안건 결정, 각 신학교수들은 3년마다 해 이사회에 서약하게 하는 것 등이다.

노진현목사의 목회와 교정(敎政)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증경총회장 장차남목사는 그는 목회자이면서 뛰어난 교정가(敎政家)였다고 한마디로 결론짓고 있다(장차남 회고록 소명과 순명 p.803).

 

[출처 : 교회연합신문]

제36회(1954) 총회장 : 권연호 [합동]

형목군목제도 설치에 크게 기여한 지도자


경북 안동 이조판서 준()의 증손

권연호목사(1898-1979. 1)는 경상북도 안동(安東)에서 양반가문으로 알려진 안동 권씨 문중에서 태어났다.

김인서는 이에 대해 권연호목사는 이조판서 준()의 증손으로 예수 믿는다는 죄명하에 안동 권씨 족보에서 할명(割名)되었다가 이즈음 복보(復譜)되었다”(신앙생활 1954. 5·6월호 참조)고 쓰고 있다.

권목사의 형제가 처음 기독교를 접한 때를 1908-1910년쯤으로 생각되며 안동지역의 최초교인으로 국곡교회를 세운 권수백 조사(1923년 장로가 됨)1908년 사랑방 사숙(私塾)을 개설하고 강낙원을 교사로 초빙하여 신교육을 시작하였는데 이곳에서 공부한 제자로 알려져 있다.

권연호, 권건호, 이장윤, 이부돌, 이삼돌, 이태술 제씨가 일직면 경내의 장사리교회의 교회학교를 설립한 것이 나타나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짐작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내 고향을 떠 경성으로 올라가 경성사범학교 구기과(球技科)1914년에 졸업하고, 잠시 소학교(오늘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 미국 북장로교 안의와(Rev. James Edward, Adams, 安義窩) 선교사를 만나 객지생활에서 일시 중단되었던 신앙을 되찾게 되었고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경성 사범 출신으로 교사생활

1916년 평양으로 간 그는 숭실대학에 입학하였고, 함일톤(Rev. F. E. Hamilton 咸逸頓) 선교사 댁에서 고학하며 공부하였다. 당시의 급우들로는 현재명, 김무생 등이 있었다.

고학과 과로로 폐결핵에 걸려 잠시 평양의 기홀병원에 입원하였다. 완쾌된 후 윤산온(Rev. G. S. Mccune, 尹山溫) 교장으로부터 병약한 몸으로 대학 졸업은 아니 해도 좋으니 신학(神學)을 하라는 권고를 받았다(기독신보 1969. 7. 26.). 그래서 1918년 대학을 2년 수료한 채, 다시 잠시동안 소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몇 해 동안 교편을 잡고 일하던 중 교사직에 회의가 들어 사임하였다. 그 이유는 자신과 같은 조선인 어린이들에게 일본의 제국주의 교육을 하는 것이 마음에 번민과 괴로움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서울창신교회 70년사. p.77).

이 무렵 192125, 안동 주재 미 북장로교 안대선(Rev. W. J. Anderson 安大善) 선교사가 안동읍교회에서 청년면려회를 처음 조직하였는데 당시 이 모임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기독신문 2009. 6. 24.). 중요활동으로는 청장년들의 신앙생활훈련, 회원상호간의 친목, 교양 함양과 절제운동이 핵심 사안들이었다.

얼마 후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입학을 위해 안동을 떠나 평양으로 갔다.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입학과 더불어 평남 강서의 기양교회 조사(助師) 일을 보면서 한 학기 공부하고 1년간 목회실습을 하며 다니다 보니 10년만인 1936년에야 졸업하고, 평서노회(平西老會)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의 목회사역을 보면 한 마디로 훌륭한 목회자상을 보여준다. 그가 가는 임지마다 아무탈 없이 승리했다. 그의 중요한 사역지로는 신학교 시절의 기양교회(1928-1937), 평북 철산읍교회(1937-1940), 만주 안동제일교회(1940-1945), 경성 창신교회(1946-1969) 등에서 착실하고도 타의 본이 되는 목회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초기 목회지였던 기양교회에서의 장기목회(9), 철산읍교회(4), 만주 안동교회(6), 경성 창신교회에서 은퇴하기까지 24년가까운 자기목회를 한 것을 들 수 있겠다.

권연호목사와 동사목회를 한 바 있었던 부산 온천제일교회의 원로목사요 예장합동 증경총회장(91)을 역임한 장차남목사는 최근 간행(2015. 3. 20 쿰란)한 그의 목회회고록(p. 772-775 참조)에서 권연호목사의 목회특징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이성문제 철저, 물질적 청렴, 도시목회에는 설교를 짧게. 이같은 목회철학은 자신에게만 아니라 후배들에게도 늘 되새겨 주곤하였다고 한다.

그의 기도생활의 특징으로서 새벽기도회에 나오면 개인기도를 보통 3시간씩 드리며 하루에도 틈틈이 기도하는 시간 5-6시간은 되었다. 다음으로 그의 설교의 특징이 있는데 성경적이며, 반드시 원고 설교를 하며, 짧으면서도 시간을 엄수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성찬예식을 비롯 결혼예식이나 장례예식에 이르기까지 종교적인 일 뿐만 아니라 장중미가 넘쳤고, 당사자들만 아니라 모든 참여하는 회중들 가슴에 깊이 아로새기게 하는 정중미가 있었다고 한다.

권연호목사의 개교회 목회활동은 창신교회에 부임하고 난 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주(滿洲) 땅에서 목회하다가 해방된 조국의 중심지 수도서울에 귀환한 입장이었음에도 여기저기에서 권목사를 필요로 하였고 불려다니다 보니 주어진 소임들이 자연히 많아지게 된 것이다.

 

1946년 형목제도, 6·25때 군목제도 실시에 기여

대표적인 사례를 든다면, 오늘의 교도소 목사제도에 큰 역할을 하였다. 해방후 미 군정 시대에 감리교인이었던 군정장관 러치 장군을 만나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들의 교도를 위해 형목제도를 실시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 일은 당시 천주교와 불교 등 여러 종교단체들이 죄수들을 상대로 교화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각 종교단체장들이 명예를 걸고 추진하고 있었는데 장로교 대표로 권연호목사가 합세하여 그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19461월 군정청령 제70호를 발령, 전국 18개 교도소마다 형무소 소장을 임명했는데 장로교 13, 감리교 5명이 교무과장으로 부소장급 대우로 임명되어 오늘의 교도소선교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주일에 실시하려는 선거를 평일로 바꾸는데 큰 소임을 다 하였다. 당시 미군정청 사령관 핫지 중장이 대한민국이 태동하는 최초의 총선일자를 주일(主日)194859일로 결정 공포하였다. 이에 마음이 아팠던 권목사는 핫지 중장을 방문해 항의하였다. 핫지 장군은 이승만박사와 상의하라고 했다. 그래서 이박사에게 갔다. 처음엔 주일예배 후에 교인들은 선거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이박사에게 권목사는 절대로 안됩니다라고 항변해 이해를 시키고 다시 핫지 중장에게 갔더니 그날이 주일인줄 몰랐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런 연후 즉석에서 이승만박사에게 전화해 510일 월요일로 연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박사는 권연호목사를 달리 대우했다고 한다.

해방 후 혼란기에 문교정책을 맡았던 안호상 문교부장관은 국가 행사 때마다 국기에 대한 배례(拜禮)를 강조했다. 권목사는 여러 기독교지도자들과 함께 신앙적인 문제라 이승만박사를 찾아가 국기에 대한 주목으로 바꾸는데 일조를 하였다고 회고했다. 주일성수 문제와 국기배례 문제는 이미 북한에서도 문제가 되어 기독교인들이 많이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6·25 당시 서울로 내려온 북한피난민 교우들을 돕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 활동했다. 이같은 일은 김구선생으로부터 찬하를 받을 만큼 동족구원에 앞장섰던 것이다. 미군 당국에 청원해 얻은 천막을 창신동 고지대 언덕받이에 치고 월남한 교우들을 수용해 구제의 손길을 뻗친 것이다. 북으로부터 계속 피난민이 내려오자 미 북장로교선교회에서도 안두화, 권세열 목사 등과 이인식, 권연호, 선우훈 장로 등이 합세해 구제에 힘을 기울였다.

또 권연호목사는 신생 대한민국 군대에 장병들의 신앙과 정신지도를 위해 오늘의 군목제도의 원형인 군속군목제도를 설치하는 데에도 크게 이바지 했을 뿐만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후원했다.

문필가요 목사였던 김린서는 그의 잡지 신앙생활(信仰生活)지에 6·25 전후 지송암, 김영환 두 목사가 제3육군병원에 가 전도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병원장 정희섭 대령이 종군목사란 직분을 정한 것이 군목제도의 시초가 되었다고 썼다.

종군전도의 시작과 동시에 권연호목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재삼 진언하고 각 교파와 선교회가 연합청원을 해 대통령령으로 정식 군목제도(軍牧制度)가 실시되었다. 이는 1884년 선교승인과 함께 조선역사상 최고로 귀중한 축복이었다고 김린서는 쓰고 있다(신앙생활 1953년 성탄호 기사).

 

교회언론에 관심가진 선비다운 목회자

권목사는 장로교 정통신학교육 방면에도 크게 기여했다. 원래 선비문화 속에서 자랐고 자신이 또한 교사(敎師)요 문사(文士) 출신인 연유도 있었겠지만, 고향 안동 장사리교회 안에 교회학교를 설립한 일로부터 만주 안동제일교회 재직시 고등성경학교와 유치원을 설립 운영하였고 성경학원에 김인서를, 봉천신학교엔 박형룡박사를 초청하여 가르치게 한 것 등은 그의 교육열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뿐만 아니라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총회직영을 일괄 취소하고 총회직영 단일신학교(현 총신대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한 당시의 총회장이었으니 교육적인 관심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총회장 권연호목사는 총신은 바울, 어거스틴, 칼빈의 신학정로를 계승해야 할 것이라고 개혁신학전통에 선 것을 선언한 것이었다.

권목사는 19544월 안동에서 모인 제39회 총회에서 교단 안의 기독공보와 신앙생활 잡지 등 언론활성화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권연호목사는 목회자로써 교정(敎政)을 맡았어도 한국교회와 교단을 위해서도 선비다운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고 할 수 있다. 은퇴 후 자녀들이 사는 미국으로 거쳐를 옮겨 쉬지않고 공원에서 로상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개인전도를 하며 건강한 삶을 살다가 19791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출처 : 교회연합신문]

제69회 총회장 : 최훈 [합동]

순교자적 삶을 산 재건파 출신 모범적 목회자

 

평양 대동강변에서 출생

최훈목사(催薰 1926. 9. 26~2008. 4. 28)는 평안남도 평양시 유리(柳里)에서 부친 최병록(催炳錄)과 모친 황병선(黃炳善) 사이 2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손위로 누님이 한분 계셨고, 조부님은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로써 일찍 개화한 어른이었다.

최훈목사가 태어나 자란 곳은 평양의 최남단이며 대동강 한 가운데 있는 양각도를 건너가는 나룻터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최목사는 월남하기 몇년 전까지는 거의 고향에서 살았다. 조부님(최재식)은 고향마을에 송산리교회를 세웠는데 이 마을 출신 명사로는 연세대 김형석교수와 총신대 김득룡박사가 있다.

부친 최병록은 숭실대학 출신이었으나 최목사가 7살되던 해에 53세의 일기로 작고해 최목사는 어머니와 조부의 슬하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고향 송산리에 있는 국민학교였던 신망학교(信望學校)에 입학하여 6년의 과정을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경성상업학교에 입학해 졸업한 후 고향으로 내려가 평양철물조합에서 근무했다.

일제 말엽에는 징병을 피하기 위해 평양서기산 밑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44부대 군속이 되어 부대가 직영하고 있던 자활농장의 통역으로 일하기도 했다.

 

해방 후 교사직 사면하고 재건교회 설립

최목사가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은 해방 이후였다. 19458·15광복이 되자 고향 송산리에 돌아가 송산국민학교(오늘의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 평생 신앙동지로 함께 활동했던 김창인(金昌仁)전도사와 이창환전도사를 신앙의 선배로 만났다.

최목사는 교사직을 사면하고 고향에 재건교회를 설립해 전도사가 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소속 전도사가 재건교회 전도사가 된 배경을 보면,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한 후 교회는 사실상 영력(靈力)을 상실하였다. 교회가 신앙의 정조를 잃어버리게 되자 뜻깊은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일제당국의 갖은 압박과 시련 속에서 고통을 당하며 투옥되기도 했다. 적게는 몇개월씩 길게는 6,7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지도자들과 신자들에겐 이만저만 실망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출옥한 성도들이 볼 때 이미 기성교회와 지도자들은 기댈 만한 지도자가 아니고 변질된 사이비지도자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신사참배로 일제와 영합한 교권주의자들은 뉘우치기는 커녕 오히려 당신들은 옥에서 고생했지만, 우리들은 교회를 지키기 위해 교회밖에서 여러분 못지 않은 고난과 역경을 겪었노라고 큰 소리치는 것이었다. 해방을 맞은 청년 최훈에게도 몹시 실망스러운 현실이었다.

정의감이 남달리 강했던 그는 성경대로 믿고 살아야겠다는 순수한 신앙을 갈망하였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앙의 절개를 지킨 출옥한 성도들의 신앙공동체인 재건교회에 출석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김일성 일당이 북한에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굳히기 시작하자 교회에 대한 탄압과 핍박의 손길이 미치기 시작했다.

1947년 최훈은 고향 망경대에서 숙청 당한 후 평안남도 순안 원일리 28번지로 거처를 옮겼다. 그 곳에서 재건교회의 담임전도사가 되었다. 청년 최훈전도사는 그 곳에서 일생을 온전히 주님께 바치기로 생각을 굳힌다.

 

공산당에 체포돼 집행유예 2

당시 청년 부흥사로 서북지방에서 맹활약하고 있던 김창인전도사도 고향 평북을 떠나 황해도 황주(黃州)에서 재건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그곳을 떠나 서울로 월남하게 되자 그 교회는 후임으로 최훈전도사를 청빙하게 되었다.

최훈전도사가 황주에서 전도사로 일할 때는 북한의 김일성 정권의 권력이 강회되고 있던 때였다. 동시에 공산당이 제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교회에 대하여 가일층 감시와 통제가 강화되었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훈전도사는 강단에서 소신있는 설교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불온한 전도사로 사상이 다른 자로 낙인이 찍혀 있었는데, 그의 설교를 필기해 상부에 보고한 정치보위부 요원의 고발로 19492월 투옥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법정에 선 최훈전도사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이때의 경험이 그후 그의 목회생활에 큰 밑거름으로 작용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하겠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인생에 있어서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깨닫게 된 것이다. 당국의 감시 속에서 긴장된 생활의 연속이었다. 언제 다시 영어의 몸이 될지 모르는 삶의 연속이었다. 그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을 가지고 평북 강계(江界)로 가서 장백산맥 줄기에 위치한 향내산에서 50일간 산기도를 하면서 영적으로 무장하게 되었다. 이러던 참에 정말 예기치 못한 6·25동란이 발발해 황주의 재건교회는 지하로 숨어들고 말았고, 최훈전도사도 교회를 사임하고 피신해야만 했다.

그냥 버티다가는 인민군대의 입대에 반대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교회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로 산속으로 피난했는데 그곳에 숨어든 내무서원에게 발각되어 총살 직전에 UN군의 공중 폭격기의 폭탄 투하로 구사일생으로 4개월간 산속을 헤매면서 생사의 가름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평양 떠나 서울로 월남

1950125일 평양을 떠나 129일 서울에 도착해 재건교회를 찾아갔다. 당시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있던 재건교회에서 고흥봉(高興鳳)목사를 만났다. 고목사는 한상동 이기선 목사와 함께 옥고를 치룬 동지였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남으로 다시 밀려 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1·4후퇴였다. 고목사와 함께 교인들을 이끌고 항도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곳에서 평생 신앙을 함께 할 멘토로 믿음의 선배 이순남권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권사 역시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옥고를 치룬 신앙인이었다. 이권사는 최훈보다 일찍 월남하여 고흥봉목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권사였다. 이때 최훈전도사를 만나 부산 영주동교회에서부터 서울수복 후엔 서울 충현교회 그리고 동도교회에 부임하여 이권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믿음의 어머니로 함께 했다.

부산에 도착한 후 얼마 안되어 김해시내에 재건교회 개척 전도사로 사역하면서 고려파 교회와 직·간접으로 목회적인 접촉을 갖게 되었고 한국교회를 보는 시각이 넓어졌다. 재건교회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 김해재건교회는 나중에 고려파에 가입해 김해중앙교회로 발돋움하게 되었고, 자신은 부산 영주동에 새로 교회를 개척하여 사역하면서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부산 고려신학교에서 개혁신학 수립

당시 고려신학교에는 한상동목사와 박윤선목사가 개혁신학의 수립과 한국교회의 정화를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 하고 있었고 그동안 받은 은혜와 신앙생활에서 쌓은 경험을 조화시켜 가면서 그것을 논리적으로 신학적으로 체계화 할 수 있었다.

1956년 고려신학교를 졸업한 최전도사는 그해 46일 신앙의 선배이며 과거 재건교회 전도사 시절부터 친분관계가 있던 충현교회 김창인목사의 부름으로 담당전도사로 부임하였다. 충현교회는 서울에 고려파 교회로써 큰 건물을 가진 유일한 교회였다. 맡은 부서는 중·고등부와 대학부 학생회였다. 이들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시야를 좀더 넓혀야겠다고 느꼈다.

나이 많은 최전도사는 자존심을 버리고 숭실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는 용기를 발휘하였다. 이것은 최전도사가 학문을 더 배우겠다는 겸손과 향학열의 발로이기도 하였다. 한편 역사의 격변기를 겪으면서 싹트기 시작한 그의 예리한 역사의식의 발로이기도 했다. 그가 숭실대학에서 역사를 배우지 않았다면 후일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학위논문으로 한국재건교회교회사를 집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숭실대학에서 우호익교수, 김양선교수, 서양사의 대가 김성식교수 등의 강의와 지도로, 재건교회와 한국교회의 모습을 새로이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길렀고 단단한 학문의 기초도 쌓을 수 있었다. 19612월 숭실대학을 졸업했다. 그의 졸업 5개월을 앞두고 평생 몸담아 목회한 동도교회로부터(당시 강도사) 청빙을 받아 19601025일 동도교회로 부임하여 원로가 되기까지 뜨거운 충성을 다한 모범적인 목회자였다.

그의 교계 활동으로는 모교의 강사를 비롯 숭목회 회장, 한국외항선교회 회장 및 이사장,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 사무국장(1982)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 회장, 대한민국평화통일자문위원, 한국항공선교회 이사장, 미주총신대 이사장, 평양노회 공로목사, 숭실대 모교를 빛낸 숭실인상, 국민일보 선교대상(1997),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1998) 등이 있고, 이를 어여삐 여기신 하나님은 그가 몸담아 사역했던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수장 자리인 총회장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지난 2015428일에는 그가 섬겼던 동도교회 예배당 본당에서 그가 떠난 후 7번째로 동도교회 성도들과 생시에 함께했던 많은 추모객들이 모여 그의 유지를 기리고 있는 모임에 참석, 새삼 고인의 신앙과 덕망을 느낄 수 있었다.

필자는 7주기에 설교를 맡은 대전중앙교회의 원로요 증경총회장 인 최병남목사는 추모설교에서 로마서 147~8절을 읽은 후, 최훈목사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 순교자적인 삶을 산 사람 생명을 건 목회와 신앙 최선을 다한 삶 믿음과 성령에 의존했던 삶이라고 했다.

 

[출처 : 교회연합신문]

제17회(1928) 총회장 : 염봉남 [합동]

 충청도 괴산 출신 염봉남 목사 (1875. 9. 27-1036. 11. 17) 는 충청북도 괴산읍에서 출생했다 . 1833 년 한문 사숙 ( 私塾 ) 에 입학하여 송철원 선생 문하에서 천자문으로부터 사서오경에 이르기까지 문리를 터득했다 . 1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