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27일 월요일

김영구 [金永耈, 1887~1928]

김영구 [金永耈, 1887~1928]

 

장로교 목사. 서울에서 출생. 일찍이 부모를 잃고 전도사인 외숙 신정균의 집에서 자라면서 신앙을 지니게 되었다

1895년 한문의숙(義塾)을 거쳐 신학문을 접하게 되었고 일어학교영어학교법률학교를 졸업하였다

1908년 대한제국 탁지부 주임관으로 임명을 받았으며,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동직을 사임하고 북만주로 탈출하였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던 이동령을 만나 같이 활동하다가 열병으로 고생을 하기도 했다. 이동령으로부터 교육을 통한 민족운동을 하라는 권고를 받고 귀국하였다. 잠시 법관과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1914년 전북 김제와 고창(高敞)에서 한국인을 위해서 헌신봉사하던 일본인 장로 마스도미 야스자이몽(枡富安左衛門)의 도움으로 양태승윤치병과 함께 일본 코오베신학교에 유학을 하였다. 1919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마스도미 장로가 세웠던 고창군 부안면 오산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윤치병은 교회를 담임하였고, 양승태는 집사로 교회봉사를 하면서 학교일을 했다. 김영구는 기숙사의 사감과 외부전도, 주일학교를 맡았다

1921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6개월간 수학을 하고 서울 인사동에 있는 승동교회 조사로 활동하다가 1922년 승동교회 제5대 위임목사가 되었다. 서울에서는, 피어선성서학원과 연희전문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다. 명설교가로 이름이 높아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 학생이 많이 모여 설교를 경청하기도 했다. 자신의 생활을 돌보지 않고 가난한 이들이나 고학생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중에는 당시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재학중이던 이환신 등도 있어 기도로 도와주고 의지하는 정을 지니기도 했다.

1925년 안식년을 맞아 일본으로 건너가 토오코오신학사(東京神學社, 東京神學大學)와 코오베신학교에서 연구하였다

1927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대표로 함태영 목사와 같이 종교법안을 반대키 위해 일본기독교 및 각 종교단체와 연합으로 활동하였으며 일본국회와 또 일본 문부대신을 만나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기독신보>의 논설위원으로 문필활동을 통한 복음전도에도 커다란 곻헌을 남겼다

1928년 미국에 유학하기 위해 준비하다가 과로로 인해 41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였다. 아들 종수(宗洙)는 연희전문학교를 마치고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된 후 서울 영세교회를 설립하여 부친의 대를 이었고 그의 손자 충열도 다시 목회에 종사하여 3대 교역자의 대를 잇고 있다.

 

[참고문헌] 김석영, 김영구 목사 이야기, 교회연합신보(1976.7.11.) ; 장로총회 1927, 1928 ; 枡富安左衛門의 일기문 ; 김춘백, 필원반백년, 1977

[기독교대백과사전]


토박이 신앙산맥 2에 김영구 목사에 대한 언급이 있다. 1910년 경 규암 김약연 선생(후에 평양신학교를 수학하고 1929년 목사가 됨)이 설립한 명동학교의 법률교사로 김철(金喆)이라는 선생이 부임하였는데그의 본명이 김영구(金永耈)로 고베 중앙신학교를 거쳐 승동교회 목사가 되었다고 전한다그는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여사의 결혼식 때 축사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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