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필순(全弼淳, 1897.4.7.~1977.2.14.)
전필순(全弼淳, 일본식 이름: 平康米洲, 1897년 ~ 1977년)은 한국의 장로교 목사이다. 부인은 교육인 차사백이다.
# 생애
경기도 용인시 외사면 석천리 농촌에서 전규식(全圭植)의 5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호는 일우(一愚)이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으며, 개신교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은 10대 초반인 1909년부터이며, 1912년 정평리교회 교인 심문택(沈文澤)이 세운 사립 봉양학교를 졸업하고 가까이에 있는 실업학교로 진학, 1년간 잠업(蠶業)과 축산(畜産)에 관한 기술을 익혔다. 이 무렵 경성(京城) 연동교회에서 내려와 열심으로 전도하던 원세성, 박용희 등에게 전도를 받아 장평리교회 교인이 되었고, 1914년 당시 순회선교사였던 톰스(Rev.U. Selwys, Toms·都瑞元) 목사로부터 1914년 세례를 받았다.
1919년 경성으로 올라와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소년부 간사로 있으면서 사립 아현보통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고 봉사하다가 나중엔 학감(學監)이 되기도 하였다.
1918년에는 대영성서공회(大英聖書公會) 서기로 근무하였고, 1919년 1월부터는 연동교회 원세성(元世性)의 추천으로 연동교회 조사(助師)로 부임 11월까지 거의 한 해동안 사역하였다.
이 무렵 개신교 계열 인물들이 많이 참여한 3·1 운동이 발생하면서 전필순도 박용희의 지도에 따라 가담한 적이 있고, 이후 세워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을 계속하다가 대동단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1921년 5월 출옥). 3·1 운동의 좌절 이후 독립 운동은 여러 갈래로 발전하게 되는데, 전필순은 옥중에서 장기적인 실력양성과 구국계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출옥한 뒤 기독교 문화사업을 중심으로 강연회 등에 참가했다.
이러한 활동이 여의치 않자 1922년부터 4년간 고베시의 신학교에 유학하였으며(1926년 3월 졸업), 잠시 연동교회 전도사를 거친 뒤 (1개월간 평양장로회 신학교에서 수학하고) 1927년 5월 연동교회를 사임한 뒤, 묘동교회 전도사로 가서 6월에 1927년 경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묘동교회 담임 목사가 되었으며 피어선성경학교(현 평택대학교 전신)에 강사로 출강했다..
1929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와 조선예수교 연합공의회 종교단체법안 반대 진정위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국회를 방문하기도 했다.
문서선교기관인 ‘기독창문사’창설
한때는 윤근(尹槿) 등과 함께 의논하고 조선예수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구성, 전국을 순회하며 전도강연회를 펼치기도 하였고, 윤치호, 이상재, 박승봉, 유성준, 박용희 등과 함께 순수기독교 문서선교 사업기구인 기독교창문사(基督敎彰文社) 창설에 참여하기도 했다. 기독교창문사는 선교사들이 초교파적으로 세운 조선야소교서회(C.L.S)와는 달리 조선인에 의해 설립된 출판사였다. 이 출판사의 대표적인 출판물 가운데는 일제 당국에 의해 출판이 보류되고 있었던 조선야소교장로회 사기(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를 출판하였고, 또 당시 성경번역위원회 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연동교회 담임목사였던 카나다 출신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사역(私譯) 성경전서를 출판했던 것이다. 이 게일의 사역성경전서는 당시 한학에 능했던 이원모(李元模)의 도움으로 직역이 아닌 의역(意譯)을 추구한 한국 성경번역사적으로도 의미있는 출판물이었다.
이렇게 볼때 기독교문화사적으로나 출판사적인 의미에서 보다라도 기독교창문사를 설립한 것은 이 게일의 사역성경을 선교사들의 공동성경번역위원회 회원 전체가 인정하지 않은 관계로 당시의 대영성서공회의 출판에 막히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윤치호씨의 도움으로 게일의 사역성경을 기독교창문사 이름으로 출간되기에 이른 것이다.
1931년에는 묘동교회에서 사임을 한 뒤 계속 뜻을 두고 있던 기독교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장로교와 감리교가 공동 설립한 기독교보사의 기자를 맡았고, 이후 전필순이 개인 명의로 기독교보사를 인수하여 1933년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기독교보사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윤치호, 양주삼, 정인과 등 교계 인물들의 반발을 겪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반일 인사로 분류되던 전필순은 이 무렵부터 차츰 조선총독부와 가까워지면서 친일파 인물로 불리게 되었다.
1935년 수송교회 목사가 되었다가, 1941년 다시 연동교회의 위임목사를 맡고 경기노회 회장으로서 장로회 총회에서 부의장으로 당선되는 등 교계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황민화 운동에도 적극 나섰다.
1937년 7월 일본이 만주땅을 항해 소위 중일전쟁을 일으키게 되자 이를 지지 찬양하는 편에 본의 아니게 서게 된다. 당시의 언론매체 매일신보(每日新報) 7월 25일자 호외(戶外)에 ‘太陽은 蒼空에 높이 떳다’라는 제목의 그의 글이 실린 것이다. 그 달 26일 종로 YMCA청년회관에서 개최된 각 종교단체 연합시국 강연회에서 같은 제목으로 감리교회 양주삼 목사와 함께 기독교계를 대표하여 강연했다.
1938년 8월 윤치호 김우현 등과 함게 중앙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주최한 기독교애국 좌담회에도 참석했다.
1939년 9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평의원(平議員)에 선임되었고, 같은 해 12월 남대문교회(南大門敎會)에서 경성노회지맹(京城老會支盟)을 결성할 때에는 노회장으로서 이사장직을 맡았다. 이른바 친일행위의 현장에 몸을 내던지고 말았다.
일본록기연맹에서 간행하는 <록기(綠期)> 1937년 11월호에 “日本의 진정한 적은 어디에 있는가?”란 글에서 일본이 막대한 물자와 고귀한 피를 흘리는 이유는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성업(大聖業)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 대업을 이루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모두가 적(敵)이라고 하였다.
1941년 4월 연동교회로 재차 부임 목회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는 경성노회 노회장으로서 총회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41년 12월 미영타도좌담회(米英打倒座談會)에도 참석했다.
그는 또 1942년 시국강연회 연사로도 활동했고, 같은 해 2월 갈홍기, 심명섭 등과 함께 “국민문학(國民文學)”에서 주관하는 반도기독교의 개혁을 말한다는 좌담회에 참석했다. 같은해 4월 조선기독교연합회(朝鮮基督敎聯合會) 부위원장을 맡았다.
9월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에서 일본기독교단 통리(統里) 도미타(富田蒲)의 래방을 계기로 기독교의 일본화의 급무라는 주제로 조선호텔에서 열린 좌담회에 참석했다. 같은 달 조선장로교회 헌납 해군기 명명식에 동참하기도 했다.
1942년 11월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연맹 주최로 조선신궁(朝鮮神宮)에서 개최된 황군환자용 자동차 3대 헌납식에 정인과(鄭仁果), 김응순(金應珣) 등과 함께 참여했다. 같은 달 안국동교회(安國洞敎會)에서 경성노회와 경기노회가 합동해 경기노회를 조직하고 노회장에 선임되었으며 국립총력경기노회연맹을 맡으며 친일행각을 계속하였다.
1943년 4월에는 새로 조직된 일본기독교조선혁신교단의 통리(統理)가 되었다(교단 내의 심한 반발에 부딪혀 한달 만에 무산된 바 있다).
광복 후인 19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구속되어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개신교 내에서 전필순과 같이 친일 행적이 뚜렷했던 정인과, 정춘수 등은 반민특위에 체포된 뒤 친일 논란 속에 교계에 다시 복귀하지 못했다. 그러나 전필순은 교인들에게 신임을 물은 뒤 '다같이 죄를 범했는데 누굴 돌로 칠 수 있겠느냐'는 논리에 따라 재신임을 받았다.
반민특위에서 풀려난 전필순은 52년 8.5정부통령 선거와 56년 5.15정부통령 선거 때 이승만-함태영 지지운동/ 이승만-이기붕 지지운동을 앞장서서 전개하였다. 자유당 정권의 3.15부정선거에 맞서 일어났던 4월혁명 시기 새문안교회의 청년들이 발표한 성명에는 자유당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했던 전필순 목사를 규탄하는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통합-합동 분열 이전의 예장 시대에 총회장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경기노회장을 5년이나 역임하였다. 그리고 1977년 사망하였을 때 언론은 그를 '독립운동가'로 묘사하였다. (1949년 3월 12일자 조선일보. 제목은 "친일목사 전필순을 체포" / 1977년 2월 15일자 조선일보. 제목은 "독립운동가 전필순 목사 별세"로 신문에 기사가 있다)
특히 한국 전쟁 초기에 피난하지 않고 조선인민군 치하에서 교회를 지킨 일로 신임을 회복해 재기했다. 195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부회장으로 다시 선임되었고, 1957년에는 총회장을 맡았다. 1959년 제44차 총회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와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국제복음주의연합) 측의 대립으로 장로회가 분열되었을 때 증경총회장으로서 연동교회에서 총회 속개준비회를 주재했고, 이로써 WCC 중심의 연동측 장로회가 탄생했으며, 오늘의 예장통합 측을 이루게 되었다. 1961년 6월에 연동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고, 1962년 5월 교역 일선에서 은퇴하기까지 21년 여를 연동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했다. 1963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승리의 길』·『목회여운』 등이 있다. 1977년 2월 14일 사망했다.
# 사후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의 기타 부문과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종교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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