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명(金東鳴, 1900년 2월 4일 ~ 1968년 1월 21일)은 대한민국의 시인, 정치가, 정치평론가, 수필가, 대학 교수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호(號)는 초허(超虛)이다.
# 생애
1900년 2월 4일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노동리 71번지에서 아버지 김제옥(金濟玉)과 어머니 신석우(申錫禺) 사이에서 외아들로 출생하였다.
1908년 함경남도 원산으로 이주하였고 1913년 다시 함경남도 흥남으로 이주하였다.
1918년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함경남도 흥남 동진소학교(東進小學校) 교사로 출발하여 여러 곳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9년 함경남도 흥남 지방에서 3·1 운동 참가를 한 뒤 1922년 시인으로 첫 입문하였으며 1925년에 일본에 유학을 가 낮에는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신학과를, 밤에는 니혼대학[日本大學] 철학과를 수학, 졸업하였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흥남시의 동광학원(東光學院) 원장을 지냈으며 광복 후에는 흥남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했으나 흥남학생의거사건(1946)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교화소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났다.
친구 현인규(玄仁圭)에게서 보들레르(Baudelaire, C. P.)의 시집 『악의 꽃』을 빌려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주시면」이라는 시를 『개벽』(1923년 10월호)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단하게 되었다.
첫 시집은 『나의 거문고』(1930)로서 이때의 시 경향은 암담하고 우울했던 역사적 현실과 아울러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아 퇴폐적이고 감상적인 경향이 농후하였다.
이 시기의 시로 남아 있는 작품들은 「나는 보고 섰노라」(1923)ㆍ「애달픈 기억」(1923)ㆍ「농녀(農女)」(1926)ㆍ「추억」(1926)ㆍ「공원의 밤」(1926)ㆍ「구라파 송(頌)」(1926)ㆍ「첫봄」(1926)을 들 수 있다. 그가 특유의 시 경지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 무렵부터였다. 그로부터 1940년대 초엽까지 약 10년간이 그의 황금기에 해당한다.
시집 『파초』(1938)와 『하늘』(1948)에 그의 시풍이 잘 나타나 있다. 이 때 그는 전원에 살면서 자연물을 소재로 한 시를 많이 썼다. 하지만, 이들은 단순한 전원시가 아니라 심층에는 민족적 비애나 역사적 고뇌가 짙게 배어 있다. 즉, 우국의 고뇌와 정열을 전원적 이미지로서 표현하였다.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파초」ㆍ「수선화」ㆍ「수선(水仙) Ⅱ」ㆍ「내마음」ㆍ「나의 뜰」ㆍ「바다」ㆍ「하늘 Ⅰ·Ⅱ·Ⅲ」ㆍ「명상」ㆍ「술노래」들이 있다. 후기의 시세계는 광복과 더불어 바뀌었는데 시집 『삼팔선』(1947)과 『진주만』(1954)은 1945년부터 1947년까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다룬 사회시이다.
『진주만』은 일본이 저지른 전쟁의 죄악과 그 인과응보적인 멸망을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다루고 있으며, 『삼팔선』에서는 작자가 삼팔선을 넘기 전까지 북한에서 겪었던 참상과 북한 사람의 우울한 생활모습을 다루고 있다.
수록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진주만」ㆍ「미드웨이」ㆍ「새나라의 구도」ㆍ「삼팔선」ㆍ「레디오」ㆍ「이방(異邦)」ㆍ「우울」ㆍ「비에 젖은 화상」ㆍ「피난민 Ⅲ」ㆍ「옥중기 Ⅲ」 등이 있다.
마지막 시집 『목격자』는 광복 전의 전원적 특질과 광복 후의 사회적 경향을 어느 정도 무리 없이 표현하고 있다. 「서울풍물시초(風物詩抄)」와 「피난시첩(避難詩帖)」의 시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자하문 밖」ㆍ「세종로」ㆍ「충무로」ㆍ「명동」ㆍ「북아현동」ㆍ「신촌동」ㆍ「미아리고개」 등 유명한 곳을 주로 스케치한 풍물시가 뛰어나다.
1947년 단신으로 월남하여 한국신학대학 교수, 다음해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같은 해 조선민주당 정치부장을, 1952년에는 민주국민당 문화부장으로 활약했다.
1947년 세 번째 시집 《하늘》을 발간 후 1948년 2월 29일을 기하여 이름을 김동명(金東鳴)에서 김동오(金東嗚)로 개명하였으나 여전히 김동명(金東鳴)이라는 개명 이전 이름을 작가로써 필명화하였다.
1955년 시집 《진주만》으로 아시아 자유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55년 《적과 동지》라는 평론을 주로 《동아일보》를 통하여 연재, 예리한 정치 평론을 하였다.
1960년에는 초대 참의원에 당선되어 5·16 군사정변 전까지 정치 생활을 하였다. 그 후 1968년 1월 21일, 3년간 지병으로 앓고 있던 고혈압으로 인하여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유해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묘소에 안장되었다가 그로부터 42년 후인 2010년 10월 10일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묘소에서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노동리 133-1번지 선영으로 유해가 이장, 봉안되었다.
# 가족 관계
재취 부인인 이복순은 이화여전 출신으로 1942년 재혼했지만, 김동명이 최용건의 핍박을 피해 흥남을 탈출하면서 이복순과 두 딸은 두고 왔다.
- 아버지: 김제옥(金濟玉)
- 어머니: 신석우(申錫遇)
- 초취 부인: 지정덕(池貞德, 1937년 사망)
- 아들: 김병우(金炳宇)
- 장녀: 김월하(金月河)
- 차녀: 김월주(金月州)
- 삼녀: 김혜숙(金惠淑)
- 재취 부인: 이복순(李福順, ? ~ ?)
- 사녀: 김월정(金月汀)
- 오녀: 김월령(金月鈴)
- 삼취 부인: 하윤주(河潤珠)
# 학력
함경남도 원산보통학교 졸업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도쿄 아오야마 전문학원 신학과 전문학사
일본 니혼 대학교 종교철학과 학사
# 경력
1960 초대 참의원 의원
1947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1946 조선민주당 함경남도당위원장
1945 흥남 서호중ㆍ여자중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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