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주 [崔錫柱, 1901-1989] - 일본 청산학원 졸업
# 장공칼럼 – 3.1 야화(夜話) : 3월은 “3.1”의 달
- “민족”이란 집단의식을 뿌리뽑기 위해서는 조선역사란 것을 지워버려야 했다. 최석주 목사가 일본 도꼬에서 학생교회 목사로 있을 때, “조선민족”이란 단어와 “조선역사”의 어떤 설화를 주일학교에서 한 일이 있다는 혐의로 잡혀 서대문 감옥에 무작정 투옥됐다. 작정 없는 미결수로였다. 최석주 동경시절에 아오야마(靑山學院) 신학에 다니던 전성천이 최석주 교회에 출석했었다는 사실 때문에 잡혔다. “최석주”가 조선역사 얘기하는 걸 들었다고만 하라는 것이었다. 증언을 날조하려는 것이다. 전성천은 아직도 학생기질이라 꿋꿋했다. “들은 일이 없소”로 일관이다. 비행기 태우기, 물먹이기 짓밟기, 주리틀기 - 몇번 실신했는지 모른다. 깨나면 또 “그렇게 써라, 지장찍어라” 한다. 종시 버렸지만 고문은 그의 기백을 멍들게 했을 것이다. 마감에는 서장이 불러들여 잘먹이고 편히 쉬게 하고 조용조용 같은 요구를 했단다. 전성천은 “하라오 깃데모” … “배를 가르는 한이 있더라도 안한 일을 했달 수는 없소” 했단다. 서장의 말 - “이놈은 중학교부터 일본에서 배워서 일본기질이 박혔으니 어쩔 수 없는 놈이다. 내보내라!”하더라는 것이다. “조센진”(조선사람 천대말)은 “모가지 날아나도…”란 맹세는 하지만 “배를 갈라도…”란 말은 안쓰는데 이놈은 일본인처럼 “셋뿌꾸”(切腹)란 말을 뱉은걸 보아 그 일본기질을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다. 그 후에 최석주도 이어 나오게 됐다.
# 대한예수교장로회 수송교회 역사
- 1943년 7월 최석주 목사 취임
- 1953년 6월 수복 후 임시로 천막 교회당을 설립하고 최석주 목사 예배 인도
- 1976년 8월 최석주 목사 임시 시무
# 서강의법학교(西江懿法學校)
- 최병헌(崔炳憲) 목사는 1904년에 감리교청년회인 의법회(懿法會,엡윗회)를 확장하며 정동 엡윗청년회 내에 “의법학교"(懿法學校)와 "몽양원"(蒙養園)을 설립하였다. 특히 의법학교는 ”국정(國政)이 나날이 시들어감을 분히 여기며 탄식하여서 자존자립(自存自立)의 정신을 고취할 목적“으로 설립하였다.(金鎭浩,”故 擢斯 崔炳憲先生 略歷“,神學世界 第12卷2號,p101-102.몽양원은 유치원과 같은 과정임)서강의법학교 설립연도에 있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감리교연감(1935년)에는 1907년으로 나와 있고, 1935년 연합운동회 때 의법학교에 대하여 1909년 설립 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이는 정확한 것이 아니다.이미 1909년 의법학교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음으로 그 이전에 설립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점은 의법학교를 졸업한 장로교회 최석주 목사도 지적하고 있다.의법학교 초창기에 대하여 제4회 졸업생인 최석주 목사(장로교)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서강교회는 그 당시 모든 교회들이 그러했듯이 교육사업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였다. 서강에 의법학교는 바로 서강교회의 중대한 사업이었다. 이 학교는 나에게 유일한 모교라 할 것이다. 나의 시대, 나의 환경은 학교에 다니기를 허락지 아니하였다. 반쯤 하다 그만두게 되고 시작만하고 끝을 보지 못하곤 했었는데 이 의법학교만은 완전히 시작해서 졸업한 학교이다. 그때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돈푼이나 있는 이들이었고 풍조에 예민한 사람들은 공립보통학교에 가는 것이 능사였다. 그 나머지 중에서 더러는 예수학교라도 좋다고 생각하여 의법학교에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 학교는 적지 아니 허술하여서 뚝배기학교하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崔錫柱,“恩寵은 江물같이”,서울,CLSK,1975.p43-46)최석주 목사는 “당시 교사로 음악지도에 김동익(金東翼) 선생, 국어 한문에 박영진(朴英鎭) 선생, 일어에 박병제(朴秉濟) 선생이었고, 동창으로는 고성진(高星鎭), 박연우(朴淵瑀), 이택주(李澤周) 최등만”이라 회상하고 있다.(최석주,恩寵은 江물같이,p47)
# 반민특위기록 : 전필순 조사 중
- 문 : 혁신교단 간부는 누구누구인가.
- 답 : 사무관장 사무관장 김영섭[金永燮], 총무국장 이동욱, 전도국장 박연서[朴淵瑞], 교육국장 윤인구[尹仁駒], 재무국장 최석주[崔錫柱], 연성국장 김수철[金洙喆](미상) 외 각도 교구장 등이 有하였으나 기억에 나지 않습니다.
# 대한예수교장로회 마포교회
- 1964년 3월 – 최석주 목사 부임(1971.1.9. 정년퇴임, 노회 공로목사 추대)
- 1964년 12월 – 최석주 제9대 목사 위임 시무
# <주일학교 찬송가, 1962>의 역사 – 오소운 목사
- 《새가정》잡지는 본래《기독교가정》이란 이름으로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발행하였는데, 1953부터《새가정》으로 제호를 바꾸었다. 발행인은 서회총무 김춘배(金春培) 목사요, 잡지 주간은 일본 청산학원(靑山學院) 신학부를 졸업한 최석주(崔錫柱, 1901~1989) 목사였다. 그리고 초대편집장은《어린이 찬송가, 1953》「축하하세 동무들아」를 작사한, 순보 이종환이었다. 제2대 편집장은 이화여대 출신의 최덕보(崔?甫)였는데, 1955년 1월 구세군 사령부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서회 편집부에 있던 내가 1955년 2월에 제3대 편집장이 되었다. 그로부터 11년 후인 1966년, 나는 최석주 목사가 담임한 대한예수교장로회 마포교회에서 장로 안수를 받았다.
# 연세대학교 대학교회 연혁
- 연세대학교에서는 1962년 4월 부활주일에 새롭게 연세대학교 대학교회 창립예배를 드렸고, 최석주(1962.5~1963.3), 김정준(1963.4~1966.7), 서남동(1966.8~1967.7), 이환신(1967.7~1974.12) 목사님에 이르기까지 10여 년간, 대강당 4층 언더우드 홀에서 예배를 드렸다.
# 대한예수교장로회 서울노회 연혁 중
- 1935.12.27. : 경성노회 임시노회가 예수교서회 회의실에서 회집되다. 함태영, 전필순, 권영식, 최석주를 다음 정기노회 때까지 정직시킴
- 1943.04.12. : 새문안예배당에서 경기노회가 재조직되다. 혁신교단에 참여했던 전필순, 최석주, 윤인구 목사 제명하다.
# 한국기독공보 - 창간 56주년 특집/ 한국교회와 함께해 온 한국 근대사의 '살아있는 역사'
- 일제말기인 1945년 일본은 한국교회를 강제로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통폐합시켰으며 이에 따라 교회 언론도 강제 폐간돼 암흑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운 법.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민족은 해방의 기쁨을 누리게 됐다.그러나 기쁨도 잠시, 기성교인과 출옥성도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는 등 분열과 갈등, 혼란이 가중됐다. 그 와중에 한국교회는 9월 18일 새문안교회에서 남한측 개신교회 전체의 모임인 조선기독교 남부대회로 모임을 가졌다.조선기독교회 기관지로 출발 본보는 이듬해 1월 17일, 남부대회인 조선기독교회의 기관지로서 '기독교공보'란 제호로 매주 목요일 4면으로 발행을 시작했다. 당시 이사회 조직은 이사장 김관식 목사(대회장) 이사 강태희, 최거덕, 김영섭, 김영주, 변홍규, 이수현, 이호빈, 심문태, 배은희, 정종원, 김창국, 김원봉, 신후승, 김춘배, 임병철, 강경옥, 엄재희 목사였고 실무진으론 편집부장 김춘배 목사, 편집부원 임영빈, 김재준, 최석주, 강태희, 송창근, 최거덕, 최윤관 목사가 수고했다.
#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회의록
- 제24회 총회 - ◎ 재경 기독교 유지회의 적극 신앙단에 가담한 박용희, 권영식, 전필순, 함태영, 최석주씨 등에게 총회는 탈퇴를 권면하였으나 이들은 총회 절연을 선언하다.
- 제25회 총회 - ◎ 경성노회 함태영, 박용희, 권영식, 전필순, 최석주목사 등을 노회에 불응하여 치리하였고, 전필순, 권영식목사는 예수교서회에서 경영하는 기독신보를 무법으로 탈취하여 갔다 하여 처벌하였음을 보고받다.
# 제1공화국 초기 이승만정부 공보선전활동의 성격
- 정부수립이후 한국전쟁기간 공보처 차장
- 최석주(1953.4~1955.2) - 일본 청산학원 신학부 졸업, 목사, 어린이잡지 새벗사 편집주간, 사장.
- 1953년 4월 23일 제3대 공보처 차장으로 취임한 최석주는 1952년 1월 5일 피난수도 부산에서 대한기독교서회가 월간으로 창간한 어린이잡지 『새벗』의 편집주간을 거쳐(최덕교, 2004, 507쪽), 사장으로 활동하던 목사였다(조선일보, 1953.4.26.). 이승만정부 고위직에 기독교 목사가 많았는데, 최석주도 그런 전형적인 인물이었다(강인철, 2009).
# 일제와 나 – 어느 평범한 목사의 수기(최석주) - 기독교사상 1974년 8월호
# 최석주 선집
- 1) 希望과 成長있는 對話
- 2) 永遠한 그리움
- 3) 적은 무리의 證言
- 4) 내가 본 人生百景
- 5) 恩寵은 江물같이
# 배재학당남가주50년사
- 최석주 목사(32회 졸업)
# 이용도 목사의 목회윤리 – 임걸(연세대 교목)
- …이용도에 대한 일반적인 일반적인 비판과는 다르게 그는 분명히 유명화라는 여자를 신격화하거나 실제적으로 ‘주님’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분명히 이 사실을 이용도가 최석주(崔錫柱) 목사에게 “물론 明花라는 그 개인이 主도 아니요, 神도 아니다. 그를 통하여 나타나는 말씀은 곧 주시다. 그러므로 그 말씀 앞에 경배치 아니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는데서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308쪽)
# 조향록 목사 – 조선 기독교 혁신교단 파문
- 나는 아직도 그 날 혁신 교단 간판이 붙어 있는 감신대 사무처 건물 안에 있던 통리 전필순 목사, 교육국장 윤인구 목사, 그리고 최석주 목사 등의 처참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을 주동했던 목사님들은 마치 가야바의 법정 문밖에 나와 주를 모른다 했던 자책에 못 견디어 가슴을 치고 통곡했던 베드로의 심정을 안고 외로운 발걸음으로 어두운 밤길을 헤매었을 것이다.
# 중앙일보 -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심기 40년『새 벗』400호 맞는다(1992.04.21.)
- 긴 역사 속에서『새 벗』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준 주요 인사들로는 김동리·황순원·정비석·김내성·김말봉·안수길·박경리·최인욱·유치환·박목월·박두진·이상로등 문단의 원로들과 최석주(전 공보부차관)·이영희(전 국회의원)·김회보(목사)·최진연(교사)등 언론·종교·교육·문화계의 원로 및 중진들.
# 한국교회 처음이야기 – 이덕주
- 최석주 목사의 증언대로, 전덕기 목사의 생애는 “예수의 교훈대로 걸인들, 가난한 자,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 천대받는 사람들을 위해 진심으로 도와주고 봉사한 생애” 였다.
# 한국교회 순교사 – 박연서(1893-1950년)
- 박연서목사는 1893년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효자리 청담에서 박성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고향마을 청담을 사랑해 일생을 청담이란 아호를 사용했다. 어려서는 8년 동안 한문을 읽었고 1908년 그의 나이 16세가 되던 해에 보성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3월 개성보창학교를 거쳐 1917년 6월 피어선성경학교를 졸업했다.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백모에게 기름을 받았던 그는 다정다감한 성격에 예수까지 믿게 되자 폭넓은 아량을 가진 젊은이로 성장했다. 피어선 성경학교에 재학시절부터 서석, 철원, 화천, 연천 등지에서 목회했던 그는 1919년에 일어났던 ‘철원애국단’의 연락책임자로 연루되어 원산형무소와 서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의 인간성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는 최석주의 "내가 본 인생백경 박연서" 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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