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28일 화요일

김대현 [金大鉉, 1873~1940]

김대현 [金大鉉, 1873~1940]

 

장로. 교육자. 187357일 경북 영일군 흥해(興海)면에서 출생했으며 유교가정에서 한학을 배우고 1901년 구한국정부 관립의학교를 수료했으며 동년에 대한민국정부 숭령전참봉(崇靈殿參奉 )에 피임되었다. 그구 흥해면협의원흥해공립보통학교 교무위원흥해명신학교 학감 등 교육활동에 주력하는 한편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후에 서울로 이주하여 승동교회에 적을 두게 되었으며 1923년 장로로 장립되었다. 그후 19393,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표 13명이 서울에서 조선신학교설립위원회를 조직하여 학교설립추진작업을 송창근 박사에게 일임하고 있었을 때 이 학교의 재단 설정을 위하여 거액의 재산을 기부하기로 약속, 그 일을 가능케 했다. 그는 부동산 소개업을 통하여 얻은 수입의 십일조를 별도로 저축하고, 그 통장의 저축인 이름을 김필헌(金必獻)이라고 명명했다. 그 이유는 그 저금통장의 돈은 반드시 하나님께 바친다는 약속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그전에도 이미 여러 개척교회들의 전도비를 헌금으로 보조하기도 했는데 그가 조선신학교 설립재단과 운영비를 위하여 바친 액수는 그 당시 일화로 30만엔이며 미화로 환산하면 25만불이었고 오늘날의 우리 돈으로는 약 15천만원에 해당되지만 당시 실제의 돈의 가치는 더 높았을 것이다. 이는 부동산과 현금을 합한 것이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설립하려던 조선신학교는 당시 휴교되었던 평양신학교가 조선신학교의 설립을 저지할 목적으로 그곳의 교회지도자들과 평남 지사의 협력을 얻어 다시 문을 열게 됨으로써 본래의 계획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설립위원장 채필근 목사가 평양신학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장로회총회는 평양신학교만을 총회 지정신학교로 지정했으며 조선신학교는 총독부의 인가도 못받고 겨우 경기도지사가 준 사설강습소 인가를 얻어 조선신학원이라는 이름으로 19404월 개원되었다. 신학원이 개원되었으나 송창근 박사가 일경의 강압으로 신학원 일을 볼 수 없게 되자 김 장로가 초대원장으로 피임되었다. 그런데 그에게도 교회 안팎으로 억압과 위협이 뒤따랐다. 첫째 교회 안에서는 조선신학원 설립이 외래 선교사들의 그 동안의 공헌을 무시하는 의리적 반역이며, 심지어는 신앙적 배교행위라고까지 위협한 목사들이 있었는데 주로 서신을 통한 비판이었다. 그중의 한 사람은 김익두 목사였다. 그러나 김장로는 그러한 서신에 회답하면서 전도사 3장 구절을 인용하여 날 때가 있으며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며 심은 것을 거둘 때가 있고, 헐 때가 있으며 세울 때가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그의 역사의식을 표명이었다. 한편 교회 밖으로는 일본관헌의 압제가 계속되었다. 조선신학원 폐쇄를 희망한 일부 교계지도자들의 요청을 들어 일본관헌은 김장로에게 강요하여 조선신학원 경영에서 손을 떼도록 압력을 가했고, 해마다 갱신해야 하는 경기도지사의 인가를 받지 못하게 방해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억압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그가 숙환으로 1940915일 별세할 때까지 신학원을 지켰다. 바로 이 무렵 서울시 일대에 걸쳐 교계인사들을 일경이 연행해 가던 때였는데 김장로 사택에 일경이 수색하러 왔다가 그가 별세한 것을 알고 돌아갔다.

 

그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었으나 함태영송창근김재준 등의 신학교육사업의 이상에 적극 호응하여 그의 재산을 희사하고 그리고 친히 신학원을 경영하였다. 그의 이러한 의지와 행동은 비록 평신도였지만 한국교회 신학교육의 새로운 발전에 대한 강한 신념의 표현이었다.

 

[기독교대백과사전]

 

김대현 장로는 경북 영일에서 출생하였다. 부모의 신앙으로 옥해제일교회에 출석했다. 자수성가한 김대현은 일찍이 분가하여 광산업을 시작하였고 재산을 모았다. 많은 재산 때문에 일본 경찰과 친일세력인 일진회(一進會)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독립자금을 상해로 보냈던 일로 여러 번 경찰서를 드나들기도 하였다.

 

그는 서울로 상경하여 동대문구 창신교회에 등록하고 출석하였다. 그리고 당시 창신교회 건물신축을 위해 많은 헌금을 냈다. 창신교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종로 2가 인사동에 있는 서울 승동교회로 이명하였다. 여전히 교회 봉사에 있어서는 그를 따라 갈 만한 사람이 없었다. 때마침 장로를 선출하는 일이 있고 승동교회 교인들은 한결같이 김대현 집사를 장로로 선출을 하였다. 이미 이 교회에는 백정 출신 박성춘 장로가 있었다.

 

김대현은 192350세의 나이에 장로로 장립을 받고 승동교회는 계속 성장해 갔다. 교회가 성장하는데 재력가인 김대현 장로의 힘은 대단하였다.

 

[한국장로신문, 2010320]

 

19186월에 흥해교회(현 흥해제일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되었다.

19365월 회갑을 기념하여 창신교회(현재는 서울 서초동에 소재)를 설립하였다.

유해는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선산에 모셨으나, 한신대학교 측이 서울캠퍼스 교정에 모시겠다고 요청하여 2003429일 서울캠퍼스 교정으로 이장하고 추모예배를 드렸다.

 

김대현 장로(1873-1940)

김영철 장로(1896-1987) 김흥수

김영환 장로(1905-1970) 김준수,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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