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철 [金永喆, 1898.10.27.~1987.7.28.]
김영철 장로(1896-1987)는 1896년(호적에는 1989년생으로 되어 있음) 10월 27일 경북 영일군 신광면 상읍리에서 노석 김대현 장로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21세에 승동교회에서 청년 집사가 되었으며, 1922년 9월 29일 홍경희 씨의 장녀 홍인순 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7남 5녀를 두었으나, 그 중 삼남 재수는 세 살 때 사망하였고, 차남 기수는 일본 중앙대학교 법학부 재학 중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에 강제 징집되어 중국 산동반도에서 22세의 젊은 나이에 전사하였다.
1905년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뒤 1911년 흥해공립고통학교에서 3년간 신교육을 받았다. 1914년 오성학교에 입학하여 졸업(1917년)한 해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의과대학 재학 중에 ‘대한독립애국단’과 항일비밀결사체인 ‘조선독립대동단’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3ㆍ1독립만세운동으로 체포ㆍ구속되었으나, 당시 의과대학 학장의 탄원으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판결받았다. 그러나 재판 진행이 늦어져 실제로는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동기들보다 늦은 1923년에 의사가 될 수 있었다.
의사가 된 후 1925년까지 전라도 고창지역에서 의료활동을 하였으며, 충북 청주 혜민병원의 부원장으로 3년간 일하였다. 1928년 5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철제의원을 개업하고, 1943년 9월에 종로구 혜화동으로 이전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까지 철제의원 원장으로 지냈다. 전쟁 중에는 피난지인 경북 포항과 안강에서 서울의원을 운영했다. 서울 수복 후에는 종로 4가 삼덕의원에서 1972년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원장으로 일하였다.
1930년에 승동교회에서 34세의 젊은 나이에 장로가 되었다. 1937년에는 사재를 헌금하여 성북구 보문동에 신암장로교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1947년부터 1971년까지 시무장로로 동소문교회(1964년 창현교회로 개칭)를 섬겼다.
1945년 재단법인 강제학원을 설립한 후에 성신여학교(현 성신여자대학교의 전신)를 후원하며 설립이사로, 그리고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재단이사로 활동하였다. 1981년에는 신흥대학의 발전을 위해 경기도 양주군에 있는 약 50만㎡(15만평)의 땅을 기증하는 한편, 경기도 의정부에 강제복지원을 설립하여 무의탁 노인들을 돌보았다.
해방 이후에 독립운동을 하며 알게 된 이인 변호사의 주선으로 한때 건국과정에서 한국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기도 했다. 그러나 혼탁한 정치판과 결별하였다.
한신대학을 위해서 ‘강제장학재단’을 설립하고 ‘강제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1987년 7월 28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91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그 12년 후인 1999년 3월 14일 아내 홍인순 권사도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두 분의 유해는 하와이의 밀리라니 공원묘지에 묻혔으나, 대한민국정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게 되어 2003년 8월 15일 광복절에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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