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28일 화요일

윤치호 [尹致昊, 1865.1.23.~1945.12.9.]

윤치호 [尹致昊, 1865.1.23.~1945.12.9.]

 


조선, 대한제국의 개혁, 민권운동가문신이자 외교관언론인교육자, 한국의 정치가교육자사상가언론인종교가이며 기독교운동가, 독립운동가에서 변절한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본관은 해평(海平), 호는 좌옹(佐翁)이다. 충남 아산 둔포면 신항리 신촌에서 서얼 출신 무관 윤웅렬과 이일령의 딸인 전주이씨 이정무의 아들로 태어났다. 187914세에 한성부 정동 출신 진주강씨 부인과 결혼하였으나 7년만인 1886년에 사별하였다. 아버지 윤웅렬이 향반에다가 서얼 출신 무관이라 무시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그는 열심히 한학 공부에 몰두하였다. 아버지 윤웅렬의 주선으로 박규수의 문하생이 되어 서재필, 김옥균 등을 만나게 되는데 이후 1896년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게 된다. 서자로 태어났단 윤웅렬은 역시 자신의 서자였던 윤치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190734일 본부인 전의이씨가 죽자 첩이었던 전주이씨 이정무를 정실부인으로 올려주고 윤치호를 적자로 인정하였다.

 

아버지 윤웅렬의 노력으로 윤치호는 188116세 때 신사유람단 조사였던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개화사상을 수용하게 된다. 일본 체류 중 그는 일본이 빠르게 서양문물을 받아 들여 근대국가로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문명개화가 시대의 정신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보다도 서양에 더 관심이 많았다. 독학으로 일본어 공부를 한 뒤, 1882년 도쿄 제국 대학 철학과 교수의 부인 밀레트(L. G. Millet) 여사와 도쿄제국대학 영어강사 간다(神田乃武) 교사 등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또한 일본을 통해 신분 차별이 없고, 적서 차별이 없고, 남녀 차별이 없는 미국과 유럽의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그는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신념으로 삼았다. 이후 그는 조선의 문명개화에 뜻을 두고 본격적인 개방, 문명개화노선을 걷게 되었다. 18835월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이 체결될 때는 초대 주한 미국공사 존 루시우스 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하여, 주한미국공사관 통역관으로 활동했다. 이후 푸트의 통역관을 겸하며 푸트와 고종, 개화파 사이를 오가며 푸트와 고종, 개화파를 연결시키며 교량 역할을 하면서 청나라의 조선 내정간섭 배제와 미국, 유럽 국가들과의 외교와 유대 강화, 각종 정치기구 개편과 민중들의 정치참여와 참정권 부여를 역설했다.

 

그는 서광범,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과 가까이 지냈고, 혁명의 성공을 내심 기대하였지만 188412월 갑신정변 때는 개량적 근대화론자로서, 주도층과의 시국관 차이로 적극 참여하지는 않았다. 윤치호는 이들의 거사 준비가 허술하고, 거사 기간이 짧다는 점과 인력을 많이 동원하지 못한 점을 보고 실패를 예감하였다. 또한 윤치호는 독립과 개화를 달성하는데 고종 만을 믿을 수는 없다고 봤다.

 

구한말에는 갑신정변으로 피신했다가 상하이에서 방황의 나날을 보내기도 하였으나, 중서서원에서 4년간 공부하며 1887년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1888년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 알렌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밴더빌태 대학교 신학부에 입학을 하였다. 1891년 밴더빌트 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에모리 대학에 입학하여 1983년 가을 에모리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을 결심한다. 미국 유학 중에 인종차별을 목격하고 마음대로 고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일본을 선택할 것이라는 일기(1893111일자 일기)를 쓰기도 했다. 189311월부터 모교인 중서서원의 교사로 영어와 영문학을 가르쳤다. 18943월 소주여인 마수진 (馬秀珍, 1871-1905)과 재혼했는데 로라 헤이굿 맥타이어 교장이 소개하여 중매 결혼 했다.

 

18952월 조선으로 귀국하자마자 그는 자신의 노비들을 석방시키고 노비문서를 불태웠다. 김홍집 내각에서 일하면서 이상재, 서재필, 이승만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민비의 암살에 동료였던 유길준이 협력자였다고 그의 일기에 지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비가 억울한 피해자라는 시중에 여론에는 반대하여 무능하고 외세를 끌어들였으며, 부패 등으로 국정의 문란을 초래했다고 보았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의 특사로 러시아, 프랑스, 베트남을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사회진화론에 입각하여 서양인들의 우월한 인종이라는 입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1897년 독립협회 활동을 왕성하게 하였고, 독립신문 발행인과 제2대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 사장 등으로 활동했으며 만민공동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강연, 계몽활동과 민권운동과 민중의 참정권 요구 운동개혁운동에 참여했고, 서재필이 강제추방된 이후 독립협회와 반청계몽운동 활동을 지도했다. 그러나 민중의 호응 미진, 정부와 황국협회 등의 탄압으로 독립협회의 실패 이후, 민중 역시 그를 황제에게 불충하는 인물로 보면서 실망, 그는 민중을 계몽의 대상에서 개조, 훈련의 대상으로 시각을 바꾸고, 실력 양성론을 주장한다.

 

윤치호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당일에 외무부협판직을 사퇴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외무부대신 서리에 임명되었으나, 자신에게 굴욕감과 동포들에게 증오감을 줄 것 외에 외무부 본연의 임무는 사라졌다고 하여 그 수락을 거부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다음날 그는 한국의 독립은 오늘 오전 1시 또는 2시경에 조용히 사라졌다라고 하였다. 그는 을사조약의 체결을 곧 독립권의 상실로 인식했다.

 

윤치호는 민주주의와 참정권의 나라인 미국에 기대를 하였지만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기 전인 1905729일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것을 접하고 미국에게도 실망하게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그는 체념하고 교육과 YMCA 청년회 활동에 매진했다.

 

그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조선이 영세중립국을 선언하고 정치적 독립을 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윤치호는 정치인들이 썩고 부패했다면 백성들이라도 정신을 바로 차려야 되는데, 백성들부터 요령과 잔머리와 사기와 기만, 허위와 술수와 험담에 찌들었다고 지적하였다.

 

이후 그는 1906년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強會)를 조직했고, 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자강회는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본이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자 이에 반대운동을 펴다 해산되어 그의 뜻은 무산되었다. 1907년 그는 안창호양기탁이 주도로 조직된 신민회에 가입하였다. 신민회의 회원이자 회장으로 활동하며 명진학교의 교사로도 출강중이던 그는 1908년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

 

1909년 안태국(安泰國)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해 청년운동을 적극 지도하였으며, 계몽강연 연사로도 활약하며 신사상과 신문물 수용, 개발 등 실력양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조선인 학생들에게 일본이 되었든 미국이 되었든 유학하여 선진국의 사상과 문물, 과학 기술을 배워와야 된다고 호소하였다. 유학을 떠나는 학생들의 자세와 소양을 살펴본 후 그는 여비와 식비를 제공하고, 장학금을 송금해준다.

 

191010월 한일병합으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그는 공직을 사퇴했다. 아버지의 사망에 관계없이 그는 정2품 이상의 고관이었으므로 남작(男爵) 작위가 내려졌다. 그러나 윤치호는 남작 작위를 거절했다. 일본 제국 정부는 윤치호에게 외무대신 직을 제안했지만, 그는 이것도 역시 거부했다. 조선의 왕족과 고관들이 일제에 협력하여 귀족이 되는 것을 보고 실망, 낙심한 그는 이후 조선총독부의 협력 요청을 거절하고 경기도 개성부로 은퇴하였다.

 

한일병합 조약 직후 도산 안창호가 거국가를 남기고 출국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는 갈등, 방황하였다. 그는 병환중인 아버지와 노모와 아내, 22녀가 있고 서모에게서 어린 이복동생 둘이 있어서 이들을 책임져야 된다는 압박감 때문에 출국을 주저했다. 이상재는 그에게 여러 번 이승만, 안창호의 사례를 들며 미국으로의 망명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후일 그는 이를 두고두고 통탄해하게 된다.

 

그해 10YMCA 기독교 청년회 부회장의 한사람으로 피선되었고, 1910년 스콧트랜드 에딘버러에서 열리는 세계선교사대회에 조선대표로 참석하여 <복음전도 사역에 있어서 토착교회의 위치 토착교회의 위치>라는 주제로 연설하였다.

 

1911105인 사건 때 다른 기독교인 및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민족주의자로서 일제에 의해 체포, 재판을 받았다. 105인 사건의 최고 주모자로 지목된 윤치호는 가혹한 고문과 함께 3년간 옥고를 치르게 된다. 191225일 그는 최종재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초기에 윤치호는 전향을 거절하였고, 191310월에는 아버지 윤웅렬로부터 승계한 자작 작위를 박탈당하였다. 1914122일에는 일본 천황의 명의로 하사된 목배(木杯)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그러나 1915년에 윤치호는 전향을 선언했다. 윤치호가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1915213일 특사로 출감한 후 매일신보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친일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나 친일파로 전향한 것인지, 단지 독립운동을 포기한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정운현은 그가 변절한 직접적인 요인은 '가혹한 고문과 일제의 강요였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그의 오랜 사상적 기반이 모태가 됐다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1916년 조선총독부는 여러 번 사람을 보내 그에게 당국 시책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윤치호는 대답을 회피하거나 거절한다. 1916YMCA 기독교 청년회 제4대 총무로 취임한다. 1918년 겨울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19191월에 열리는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의 대표자를 선발하여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윤치호는 회의적이었다.

 

1919117, 송진우가 찾아와 31 운동에 동참해달라고 했을 때 그는 조선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을 것이며, 열강 중 어느 나라도 바보처럼 조선 문제를 거론해서 일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독립만세 운동참여를 거절했다.

 

윤치호에게 만세 운동에 적극 나서줄 것을 호소하려는 젊은이들이 수시로 찾아왔다. 그는 정의롭거나 도덕적으로 우월한 국가나 이념이 세계를 지배한 것은 아니라고 봤다. 외관 상 평화와 정의를 표방하지만, 현실은 국력과 무력이 세계를 실제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은 도덕적 이상은 보편타당한 진리라고 했지만, 윤치호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국가는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한다고 해도 도덕적으로 우월한 국가나 개인이 반드시 세상을 주도하거나 지배하는 것은 아니라며 반박하여 되돌려 보냈다. 이어 종로청년회관으로 신익희가 윤치호를 찾아가 세계 대세와 국내 정형을 설명하며 독립운동에 동참을 권하였다. 그러나 윤치호는 기회가 아니라며 사절하였다. 무참하게 거절당한 신익희는 그를 소인배라며 질타하고 일어섰다.

 

1919331 운동 당시, 독립운동가들로부터 국민대표로 서명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했고, 이는 실망한 일부 학생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된다. 그는 이 민족적인 거사를 순진한 애국심에 기초한 민족주의자들의 무모한 행동으로 파악했다. 그는 한일병합 이후에도 신문과 방송매체를 통해 선전, 선동을 하는 지식인들을 혐오하고 경멸했다. 윤치호에 의하면 그들은 '자신들은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다른 순진한 사람들을 죽음의 골짜기로 몰고 가는 저주받을 악마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는 젊은이들을 무책임하게 죽음으로 몰고간다며 일부 민족대표와 독립운동가를 무책임한 인사라고 비판했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선동이 독립을 불러오기는커녕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한국인들을 더욱 가혹하고 엄하게 다룰 구실만 제공할 뿐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독립에 대한 의지는 당연하지만 단순한 만세운동 만으로는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봤다. 기마경찰 앞에서 맨손으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것은 무모하고 위험천만한 짓이었을 게다. 윤치호는 32일자 일기에서 학생들의 소요는 무단통치를 연장시킬 뿐이라고 했다. 그들의 행동처럼 만약에 거리를 누비며 만세를 외쳐서 독립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남에게 종속된 국가나 민족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194월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설치되자 그에게도 임시정부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 그러나 그는 임정 참여를 거절하였다. 이후 윤치호는 개인적으로 미국과 상하이를 오가는 김규식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서신과 유선을 통해 그는 국내외의 정세와 임시정부의 활동 등의 정보를 수시로 교류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의 초기 재정을 담당했던 이시영과도 연락이 닿았다. 그는 김규식, 이시영, 안창호, 여운형, 이승만 등을 통해 임시정부의 활동도 상세히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그는 조선총독부나 일본 제국 당국에 임시정부에 대한 것은 일체 발설하지 않았다.

 

윤치호는 1919년부터 1920년대 전반기에 걸쳐 전국의 각 지방 농촌을 무대로 '문화정치'라는 주제로 강연활동을 다녔다. 31운동 이후 전개된 독립운동에 대해 윤치호는 부정적인 시각을 피력했다. 그는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쉽게 승인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일본의 '독립불용인론'을 주장했으며 '독립불용인론'을 전제로 한국인들의 '자치능력결여론'도 주장했다.

 

기술과 자본과 시장이 없는 조선물산 장려 바자회가 무슨 수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지 안타까워 했다. 윤치호는 한국이 독립하려면 실력을 양성해야 하고, 실력 양성을 위한 바탕으로는 경제력과 국민성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국민성을 개조하고 경제력을 향상시키기 전까지는 독립은 고사하고 자치능력 조차도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조선의 당면문제는 백성들에게 유해한, 맹목적인 독립운동이 아니라 실력을 키워 지적경제적인 부분의 향상을 하고, 지적·경제적 측면의 향상을 통하여 일본인들에게 받는 민족적 차별을 철폐 하는 것이 우선임을 강조했다. 그는 땅을 팔아서 독립운동자금을 대주는 것보다 농경지를 매입해 그 땅이 일본인들 손에 넘어가는 걸 막는 사람을 더 현명한 애국자 라고 평가했다. 토지는 생산력의 근본이었고 토지에서 생산되는 식량과 곡물, 자원, 그 밖에 목축업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19211월 이상재, 이승훈, 김성수, 송진우, 유진태, 오세창 등과 함께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으로 발기인 모집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1924년 중반을 기점으로 동력을 잃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불온사상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기성회 임원을 미행하고 강연을 막았다.

 

이승만과 임시정부 인사들은 1919년의 파리 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것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1922년의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다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할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윤치호는 워싱턴 회의에 또 다시 한국의 독립 청원을 계획하며 독립의 가능성을 점치는 이승만 등 한국인 민족 지도자들의 기대를 "터무니 없는 생각"이라 여겼다. 그가 외교독립론 마저도 터무니 없는 생각이라 여긴 것은, 미국이 자국의 이익이 되지 않을 미일전쟁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미국보다 일본이 힘이 약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단순히 힘의 관계인 것만이 아니라, 전후의 국제사회 질서를 재편할 주도권과 부담을 갖고 있는 미국이 자국민과 자원의 손실을 입으면서까지 전쟁을 불사할 정도로 어리석지도 않고, 국제관계가 감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한국이 미국의 이익에 그리 중요하지도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미국이 자국의 국익이 되지 않는다면 왜 한국의 독립을 도와주거나, 후원하겠는가 라는 것이었다.

 

1920814일 미국의 의원단이 방한하자 양기탁은 미국 의원 일행이 서울역에 내릴 때에 독립공고서(獨立控告書)를 제출하고 이들에게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시위를 계획했다가 또다시 체포되었고, 양기탁의 재투옥 소식에 충격을 받은 그의 어머니는 829일 사망했다. 829일 윤치호는 조선총독부에 보석금을 제출, 인도적 차원의 석방을 탄원했고, 양기탁 역시 장례식을 이유로 보석금을 내고 일시 석방되었다. 그러나 양기탁은 바로 열차편을 이용하여 만주로 탈출했고, 양기탁의 일시 석방을 주도한 그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일제는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이후 한국을 근대화·문명화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을 위한 것이며, 철거하거나 없앴을 경우 일본이 조선보다 100배 이상은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이 육성한 조선인 엘리트들의 존재 역시 그들이 사라졌을 때, 조선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손해를 본다며 응수했다.

 

윤치호는 1922111일 송도고등보통학교 제4대 교장(敎長)에 취임하였다. 송도고보를 맡게 되면서 그는 영어 교육과 신앙 교육 외에 국내에서 사용하는 물품은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어야 된다고 봤다.

 

19267월 광주에서 벌어진 6.10 만세 운동의 배후로 지목되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가, 총독부에서 그가 시위를 주도한 학생 대표자들과 연결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그는 바로 풀려났다. 1927년 월남 이상재의 사회장 장의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이상재의 장례식을 주관하였다. 그해에 이상재와 최병헌이 병으로 고통받다가 세상을 떠나자 윤치호는 이를 애도했고, 그의 몇안되는 지인이 사라지면서 고독과 상실감에 빠지게 된다.

 

1927년 신간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송진우를 신간회 회장으로 추대하는데 실패한 김성수는 윤치호를 신간회 회장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기도한다. 김성수는 신간회의 조병옥, 허헌, 김병로, 이인 등을 통해 윤치호를 회장으로 추대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김성수측은 신간회의 세력확대에 수수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2712월 신간회 평양지회 창립에 작용하였고, 박영효와 함께 192712월 민족개량주의의 대부인 윤치호를 신간회 회장으로 옹립하려고 노력하였으며, 1928년 초에는 송진우가 경성지회에 입회하였다.

 

한편 윤치호는 신간회에 가입하였으면서도 별도의 조직을 결성한다. 윤치호는 박희도와 함께 별도로 신우회(信友會)를 조직하였다. 윤치호, 박희도 등은 신우회를 표현단체로 하여 각파 합동전선을 전개하였다. 윤치호와 박희도는 신우회를 중심으로 내분에 휩싸인 신간회를 흡수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의 흡수 노력은 사회주의자들의 반발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1930년초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가문의 개인적인 빚으로 이순신 사당의 위토가 일본인 투기꾼에게 넘어가게 됐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즉각 이순신 사당 위토 매입을 위한 모금운동을 선언한다. 이순신 후손의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나서자 남궁 억, 한용운, 김성수, 정인보, 김병로, 조만식, 송진우, 안재홍, 홍명희, 허헌 등이 즉각 동참을 선언했다.

 

1931년 조선총독부는 그에게 사람을 보내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원직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931년 친일 단체인 토요회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러자 송진우는 그가 토요회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서도 따끔하게 비판해 주었다. 송진우와의 언쟁 끝에 송진우는 그를 변절한 소인배라며 질타했다. 그러자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서 송진우 같은 이는 내가 토요회와 같은 모임에 관여하는 것에 반대한다. 물론 나도 그런 회의 멤버가 되고 싶지 않다라며 불가피성을 역설하였다. 이후 각종 강연에 억지로 참여하였지만 그는 일부러 자신이 연장자라는 점을 이용, 맨 끝으로 순위를 미룬다음 "이미 훌륭한 연설은 앞의 연사들이 다 했으니 따로 할말이 없다"거나 "오늘의 좋은 말씀은 먼저 연사들이 다 말씀하셨다"며 강연을 우회적으로 회피하였다.

 

일제로부터 협력 제의가 들어오자 그는 교육, 사회활동으로 만족한다며 일단 거절하였다. 그러나 1937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민조선총독력연맹에 참가하고 미나미 지로(南次郎) 총독의 정책에 찬성 하고, 19377월 총독부 학무국 주최의 시국강연회에 이어 2차 전선순회 시국강연반 강사에 명단이 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참여 동기를 묻는 지인들에게 간단하게 언급하거나 언급을 회피하였다.

 

한편 그는 안창호의 석방을 탄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안창호가 쇄약해지자 보석 탄원을 냈고 1935311일 출감, 경성제국대학 부속 병원에 입원한다. 그러나 안창호는 간경화, 폐렴, 만성기관지염, 위하수증, 복막염, 피부염, 소화불량 등의 합병증으로 고생했고 막대한 병원비가 들어갔다. 병원에 입원한 안창호의 치료비를 김성수와 함께 부담하고 있었다. 그러나 윤치호와 김성수의 비용 조달에도 고문으로 쇠약해진 안창호는 310일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안창호의 장례식날 그는 대성 통곡하였다. 안창호의 죽음에 감정이 북받친 그는 일주일 이상 밤낮으로 통곡하다가 청년들과 가족의 만류로 겨우 진정한다.

 

1938년까지 그는 일본 천황과 일본 왕족의 생일과 결혼식 등의 행사를 기념하는 공 · 사적 파티나 모임에 한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318일 공익에 기여한 이에게 상훈을 수여할 때 그에게 포장(褒狀)이 수여되었지만 역시 불참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사실을 모두 파악, 기록해 놓았고, 그해 5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경찰관 등으로부터 1938429일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한 일본천황 히로히토의 탄신일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놓고 추궁당했다.

 

그의 일본인 친지였던 야마가타 데이사부로(山縣悌三郞) 역시 그가 총독부에서 주최한 천황 탄신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질문하며, 과거 일본 천황과 천황가의 경조사 기념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점, 총독부에서 그의 행적을 파악한다는 것을 귀띔해주었다. 일본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미행, 정탐했다는 것을 깨닭게 되자 그는 경악한다.

 

일본은 중일 전쟁 발발 후 강압적인 사회 체제를 조성하면서 1938년에 뒤늦게 흥업구락부 사건을 일으켜 이 단체 관계자들과 교회지도자 및 연희전문 교수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이는 전쟁 수행을 위해 사회 불안 요소를 제거함과 동시에, 이들 기독교 지식인 세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미국과의 전쟁을 대비하는 다목적 포석이었다. 일제 당국은 73세의 윤치호를 중추원 참의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거절했다.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검거된 회원들은 강제로 전향해야 했고 흥업구락부도 해체되었다. 이 사건 이후 흥업구락부의 핵심 인물이던 윤치호와 신흥우, 유억겸, 정춘수 등은 전쟁 기간 중 일제에 협력했다.

 

일제는 민족주의 인사들을 일망타진할 목적으로 19378월부터 19383월 수양동우회 사건을 날조하여 민족인사를 검거한다. 윤치호는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들의 신원보증을 하거나 탄원서를 작성하여 석방케 하였다. 19385월경 흥업구락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는 그의 사촌동생인 윤치영도 연루되었는데, 윤치영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전기고문과 팔다리를 옭죄는 고문을 당하였다. 윤치영의 면회를 왔다가 고문장면을 본 동아일보 기자 서정억이 일본 경찰에 항의했다가 구타당하여 뼈가 부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윤치호는 윤치영 등의 신원보증과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서명을 받고, 탄원서를 제출하여 흥업구락부 관련자들을 모두 석방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언론인을 구타했다는데 대한 일본 언론계의 항의와 기독교대회 참석차 방문했던 일본의 기독교 YMCA 청년회 인사들의 협력도 작용하였다.

 

194017, 그는 사촌 동생 윤치오의 집으로 형제와 사촌들을 소집했다. 그날 오후 330분 윤치소, 윤치영, 윤치왕, 윤치창 등과 함께 윤치오 집에 모여 창씨개명 문제를 논의했다. 윤치창, 윤치왕, 윤치오는 아이들을 위해 창씨개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윤치영은 창씨개명을 완강히 반대했다. 윤치소는 아직 그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 결정된 것은 없었고 윤치호는 고민하였다.

 

가족들과의 논의 끝에 창씨개명을 다짐하고 성을 윤()의 파자인 이토(伊東)로 정하였다. 창씨개명 직전에 윤덕영 등이 반대하여 장내가 소란해지기도 했었다. 그가 문중 결정에 따라 창씨개명을 단행하자 실망한 학생들이 그의 집앞에 와서 연좌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19405월 당시 창씨개명은 그의 자의에 의한 창씨개명은 아니었다. 19404월에 열린 해평 윤씨 문중의 문중회의 결과 창씨개명을 하기로 결의되었고, 문중회의에서 창씨 성을 이토(伊東)로 하기로 정해지자 그는 이토 치코로 개명했다.

 

19411월 국민정신총력연맹 이사에 선출되었다. 19412월 제4대 연희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언더우드 2세 교장이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반일 선동을 한다는 이유로 추방된 뒤 연전 이사회는 재단 이사의 한 사람인 그를 천거했다. 미국에 유학한 일이 있는 그는 연희전문학교의 실정을 동정하고 있었고 총독부에서도 명사 대우를 하는 터이므로 학교를 지키는데 다시 없는 적임자로 보여 이사회가 천거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조선총독부가 연전을 빼앗기 위해 그 다리로 그를 사용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윤치호는 거부하였지만 이사회의 무기명 투표 결과 윤치호가 교장으로 선임되었다.

 

194311월 윤치호는 이광수·박흥식·송진우·주요한·한상룡 등과 함께 학도병 종로익찬위원회를 개최하여 학병 권유를 위한 호별 방문, 권유문 발송, 간담회, 학교강연회 개최 등을 결의하였으며 5일간 진명학교 등 10개소에서 학병권유 부형간담회를 열었다. 116일 언론에 '내 아들 이어든 속히 지원하라는 전보를 발송하자'는 제목의 담화문을 기고하였다. 그 날 중추원에서 개최한 단합회에 참석했고 학병제의 솔선협력을 결의한 후, 평남지역 독려강연반 연사가 되어 이튿날 90여 명과 함께 YMCA에서 학병제 경성익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112일 평양에서 열린 학도병독려 연찬회에 연사로 참석하여 강연하였고, 매일신보에 학병 독려 담화문을 발표했다.

 

1945815일 일본이 패망, 방송을 통해 히로히토 일본 천황의 항복선언 소식을 접하였다. 그는 이를 당연한 결과로 여겼다. 19458월 광복 이후 그는 친일반민족위원회 및 경향갤러리에 체포되어 명동재판소를 거쳤으며 3개월간 투옥당했다가 풀려났다.

 

1945819일 개성 자택에 괴한이 침입하여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피습은 실패하고 괴한은 도주했다. 이후 윤치호에 대한 비난과 규탄이 줄을 이었고, 외출시에도 그를 친일파, 매국노라는 학생들이 나타나 돌과 휴지를 던졌다. 그러나 그는 학생들의 비난과 투석에 개의치 않고 개성과 서울을 활보하였다. 고향 신항리 신촌에 세워진 '전 협판 윤치호 불망비'는 파괴되었고, 음봉면 음봉국민학교에 세워진 기념비는 학교 구내로 옮겨간 탓에 무사하였다. 9월 서울에서 한민당(韓民黨)이 창당되자 그를 원로로 추대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

 

194592일 인천을 통해 미국 육군 24군단이 주둔하였다. 이때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파견한 대표단은 미군정이 한국 정부의 조직에 활용하길 바라는 믿을 만한 인사들의 명단에 여운형과 여운홍, 안재홍 등의 건준 지도부와 당시 보성전문대학장인 김성수를 포함한 전, 현직 교육계 종사자 6명 등 모두 17명의 인사를 추천하였다. 그리고 적극 배제해야 할 인사로는 미국과 기타 외국에서 교육받은 친일파로서 윤치호, 박흥식 등 14명의 명단을 제시하였다.

 

19451020일 친일파 청산 문제가 거론되자 그는 이승만과 김구, 미국 군정청에게 각각 <한 노인의 명상록>이라는 제목으로 역사의 불가항력을 역설하는 편지서신을 보냈다. 편지에서 그는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자신들이 독립을 쟁취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애국자연 하는 독립운동가가 독립을 이룩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독립을 달성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일본의 신민으로서 '조선에서 살아야 했던' 우리들에게 일본 정권의 명령과 요구에 응하는 것 외에는 어떤 대안이 있었겠습니까? 우리의 아들들을 전쟁터에 보내고 딸들을 공장에 보내야만 했는데, 무슨 수로 군국주의자들의 명령과 요구를 거역할 수 있었겠습니까? ...(중략)... 그러므로 누군가는 일본의 신민으로서 한 일을 가지고 비난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중략)...

우리는 해방이 선물로 주어진 것임을 솔직히 시인하고, 그 행운을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 잃었던 보석을 찾은 듯한 은혜를 입은 만큼, 겸허한 마음으로 다시는 그것을 잃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소한 개인적 야심과 당파적인 음모와 지역간의 증오심일랑 묻어두고,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나라의 공익을 위해 다 함께 협력하여야 합니다. 우리 나라의 지정학적 상황을 미루어 볼 때, 민중들의 무지와 당파간의 불화 속에서 우리 조선의 미래를 낙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분열되지 말고 단결해야 합니다. ...(중략)...

 

마치 자기들의 힘과 용맹성을 가지고 일본 군국주의로부터 조선을 구해내기라도 한 것처럼 어딜 가느 으스대며 다니는, 자칭 구세주들의 꼴이란 참으로 가관입니다. 그들은 아둔하거나 수치심이 없는-아마도 그 둘 다인-사람들인지라, 조선의 자유는 달나라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의 자유만큼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입니다. ...(중략)...

 

이른바 그 '해방'이란, 단지 연합군의 승리의 한 부분으로 우리에게 온 것 뿐입니다. 만일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더라면, 저 허세와 자만에 찬 (자칭)'애국자'들은 어떤 사람이 큰 지팡이로 일본을 내쫓을 때까지 계속해서 동방요배를 하고 황국신민서사를 읊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허세와 자만에 찬 저 '애국자'들이 일본을 몰아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194511월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했다. 임정 요인 환국 직후 김규식이 그를 찾아왔다. 이후 여러 번 김규식의 방문을 받았으나 그는 김규식에 대한 정치적 지지표명은 하지 않았다. 그 뒤 그는 다시 친일파의 석방, 사면론을 주장하였다. "애국자들의 공갈협박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도록 고도의 정치행위이자 보편적 정의로 일반 사면을 단행해야 하는"것이 그 이유였다. 그에 의하면 친일파들을 사면, 석방해주어야 되는 이유로 그는 사이비 애국자들의 공갈과 위선, 폭력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11월초 윤치호는 이승만, 김구와 면담하려 하였으나 모두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특히 이승만의 비서로 있는 사촌동생 윤치영을 통해 이승만 측과 교섭하였으나, 이승만은 바쁘다는 핑계로 만남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경교장 역시 윤치호의 방문 요청에 답변을 회피했다. 광복 직후 그는 친일 협력자 내지는 거물 친일파 정치인으로 수시로 규탄, 비판당하였고, 수시로 비난과 논쟁에 시달리며 이를 반박하였다. 11월 말 치아에 통증을 느낀 그는 경성부에 있는 치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오던 중 노상에서 갑자기 졸도하였다.

 

1945129일 오후 4시 경기도 개성부 송도면 고려정(開城府松都面高麗町) 자택에서 뇌일혈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임종 직전 그는 중풍으로 불편한 몸으로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들은 삼가하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비장한 유언을 남겼다 했다. 광복후 친일파로 규탄받자 그의 병세 가 악화되었으며, 시중에는 친일파로 몰리자 슬퍼하여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의 외손녀 조영숙은 윤치호가 뇌일혈로 쓰러지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고 밝혔다. (좌옹 윤치호평전 530P)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연세대학교 교내 단체가 선정 발표한 연세대학교 친일파 명단과 기독교대한감리회가 2005년 공개한 감리교 내 친일 부역자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변절자라는 견해와 나약한 지식인이라는 비판과 근대인, 냉철한 합리주의자라는 상반된 시각과 평가가 존재하고 있다.

 

2008년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의 교수 박노자는 그를 영화화 할 역사인물로 추천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윤치호는 어찌 보면 한국 근대사 최초의 세계인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또 한편으로는 애국가를 작사한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일제 시절에는 조선민족에 자립의 능력이 없다고 판단해 대지주인 자신의 계급적 이익에 따라 친일을 한 것도 사실이다. 국제성, 민족주의, 친일근대적 이념과 지향의 다면적 구도에서 한 개인이 배회하는 과정은 윤치호를 통해 대단히 잘 보여줄 수 있다. 그를 영화화하자면 그건 시대와 개인의 극이 될 것이다. 매혹적이면서도 잔혹한 격변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개인에게 요구하는지, 개인으로서 새로이 열린 세상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기가 얼마나 힘드는지 보여주는인물이라는 것이다.

 

20097월 민족문제연구소 전라북도지부에 의해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에 세워진 윤치호의 공적을 기리는 영세불망비 3기 중 2기가 발견되어 강제 철거당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는 20104월 제보를 받고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현장을 답사, 부귀초에 철거 협조 공문을 발송하는 등 학교측과 부귀면의 협조로 일제잔재물인 윤치호 불망비를 철거하였고 윤치호의 친일행적을 비판하는 안내판을 함께 세워두었다. 그러나 '친일이라도 진안군의 역사를 담은 문화재'라는 일부의 주장과 윤치호의 종중 후손들의 끈질긴 요구로 불망비는 2012년 반환됐다.

 

독립협회와 계몽운동 당시 윤치호는 무지한 조선의 민중을 계몽으로 새롭게 거듭나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그가 미국 유학 당시 기독교에 입교하고 교리를 배우고 서구의 사상을 접하면서 이를 조선에 받아들여 사회를 바꿀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독립, 계몽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원인을 그는 민중의 무지함 때문이라 보았고 이는 후에 조선이 일제 식민지가 되는 것을 당연한 징벌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계몽과 개혁으로 근대 한국이 소생할 기회를 한국인 스스로 저버렸다고 판단한 그는 독립운동에도 회의적인 시각을 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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